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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동진의 시집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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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783회   작성일Date 06-12-14 17:02

    본문

    일상, 반일상, 일상 너머
                                                        - 전동진

    박재도, 『자동점멸등』(현대시)
    안창현, 『외계행성으로』(시와정신사)
    신덕룡, 『소리의 감옥』(천년의시작)
    김종미, 『새로운 취미』(서정시학)

    1.
    백발이 된 호메로스는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 이름을 드높인 시를 썼다고 전한다. 사소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치(年齒)에 이르러 괴테 역시 최고의 문학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시는 직관을 통해 열리는 관조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니 시인이 지녀야할 정신적 태도는 청년기보다는 노년기 쪽에 가깝다는 것이 헤겔의 견해다. 물론 ‘직관’의 문은 불같은 정열을 쏟을 때 열린다. 헤겔 역시 청년기의 창작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직관과 감정의 힘이 그때까지 유지되어 있다면’ 이라는 단서를 달고 헤겔은 ‘노숙한 시기야 말로 시가 최고로 성숙되는 시기’라고 강조 한다.
    삶에서는 성숙미가 물씬 배어나고 생활에서는 노련미를 더해가는 중년(中年), 그 중년(重年)을 살고 있는 세 명의 시인을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들 시에서는 ‘직관과 감정’의 힘이 어느 신진 시인들 못지않게 역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들 역시 그 등단한 해만 따져보면 신진 시인들과 다르지 않다. 1996년에 문단에 나와 두번째 시집 『자동점멸등』(현대시)을 펴낸 박재도 시인, 2004년 등단해 첫번째 시집 『외계행성으로』를 상재한 안창현 시인, 2002년에 등단해 첫번째 시집 『소리의 감옥』(천년의시작)을 상재한 신덕룡 시인, 1997년에 문단에 나와 역시 첫번째 시집 『새로운 취미』(서정시학)를 펴낸 김종미 시인이 그들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일상만큼 중요한 것도, 또 일상만큼 하잘 것 없는 것도 없을 것 같다. 현대인들은 일상에 목을 매고 산다. 또 혼신을 다해 일상을 벗어나려고도 한다. 그래서 열심히 일한 당신은 성취감이나 행복감에 젖어드는 것이 아니라 떠나야 한다. 일상의 극단적인 양 측면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생활을 영위한다.
    ‘생활’은 아무래도 단선적이다. 많이 양보해도 명면을 벗어나기 힘들다. 시계-시간으로 정해진 시간들 - 아침, 출근, 점심, 회의, 퇴근, 저녁, 수면- 위를 오차 없는 오가는, 소위 ‘걸어다니는 시계’로 사는 것이 인정받는 길이다. ‘삶’이라는 말에는 깊이, 혹은 높이가 더해져야 할 것 같다. 평면에 높이를 세우고, 깊이 파고 들어 생이 거처하고 뛰놀 지평을 입체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지평을 확대시키는 높이와 깊이는 일상에 기반을 두기도 하고, 일상을 부정하는 과정을 통해, 또 일상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기도 하다.
    갇힌 시간 속에서 생은 불안에 휩싸여 세계를 배회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과거로, 미래로 열린 시간 속에서 생은 약동한다. 갇힌 시간 즉 지속으로부터 단절된 시간에서의 삶을 베르그송은 ‘빈약한 삶’이라고 말한다. ‘풍요한 삶’은 현재 속에서 훌륭하게 평형을 잡고, 그러면서도 언제든 과거나 미래로 쉽게 왕래할 수 있는 삶이다. 베르그송은 인간의 우아함은 ‘시간의 흐름을 타는 것’으로 현재의 태도가 미래를 직접 예고․지시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일상을 기반으로 일상을 사랑하면서, 다른 일상을 구상하고, 또 일상 너머로 ‘우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네 시인을 만나보자.

    2.
    현실을 사는 존재의 가장 구체적인 삶의 양식이 일상성이다. 삶의 양식으로서의 일상성은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조망을 지닌 무한한 영역인 지평 위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적 경험 속에서 주어지는 지평은 사람이 자기를 새롭게 하고 또 실현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이 지평은 사람마다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수치로 계량화된 하루의 시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진다. 시침의 720°라는 수치화된 1일의 시간은 양적으로 균질화된 시간이다. 이런 시간은 삶의 지평을 열지 못한다. 지평은 ‘순간’이라는 근원인상을 통해 열리는 데, 양화된 시간에는 생의 근원이 되는 ‘순간’이 주어져 있지 않다.
    인간에게는 세 번의 순간이 주어진다. 최초의 순간은 태어남의 순간이니 있었으나 ‘기억’할 수 없다. 마지막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니 있을 것이나 ‘기대’할 수 없다.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는 순간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열리고(生) 닫히는(滅) 순간이다. 이 순간은 현존재의 거처인 현재의 근원인상이며, 세계와 자아가 상호 지향적 통일체를 구성하는 핵심이며, 만유(萬有)와 일자(一者)가 소통하는 문이기도 하다. 이 순간을 근원인상으로 삼아 현재의 지평은 높아지고, 깊어지며 확장하는 것이다. 마치 나의 존재를 인식하며 점등되고 소등되는 ‘자동점멸등’과 같이.

    캄캄한 지하 계단
    조심스레 발을 들여 놓는다
    어둠 속에서 기다리던 자동점멸등은
    환하게 밝은 불을 켜 준다
    그러나 몇 발자국 지나면 곧 불빛은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제자리를 찾는다
    짧은 환영과 환송 사이로
    점멸기가 또 한 번 계수기를 누른 것이다
    아무 도움도 위로도 소용없는
    쓸쓸한 계수기 아래
    내가 잠시 노출된 것이다.
    - 박재도,「자동점멸등」전문

    ‘자동점멸등’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환영’(生)과 ‘환송’(滅)을 구성하는 ‘순간(근원인상)’이 된다. ‘나’로 해서 ‘자동점멸등’은 그 존재의 의미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자동점멸등’ 아래 무심코 모습을 드러낸 ‘나’처럼 캄캄한 우리의 의식의 어둠에 나타나서 불을 밝히게 한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은 의식으로 아예 침잠을 해서 생애 동안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것이고, 또 어떤 것들은 시시때때로 떠올라 웃음과 눈물과 한숨을 짓게도 한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점멸기가 또 한 번 계수기를 누른 것’만큼의 긴장도 없이 살아간다. 일상은 축적되지 않는다. 분주히 오갈 뿐이다. 축적되는 것은 기억이다. 이 ‘자동점멸등’이 일상이 아닌 우리의 내면에서 점등되는 순간, 나에게 ‘잠시’라도 ‘노출된 것’들은 모두 ‘계수기’를 통해 ‘기억인자’를 부여 받게 된다. 이렇게 축적되는 기억들은 점등과 소등 사이에 떠올라 두터운 생의 지평을 펼쳐놓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들은 이 지평 위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자동점멸등’은 의식과 일상 사이에 놓인다. 일상 속에서 깜박이는 ‘자동점멸등’은 시계와 다르지 않다. 박재도 시인의 시편들 중에서 「시계」연작은 주목을 끈다. 전편이 실리지 않은 아쉬움이 있으나 그 편수가 스물두 편에 이르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시간’에 대한 시인의 남다른 관심을 엿보기에 부족하지 않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마른 땅에는 겨울바람이 스산하다
    나는 목도리며 외투며
    아직도 내의를 입지 않는다

    당신은 어째서 저항을 하시죠*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외투가 필요하지 않다는 신념과
    추위에 대한 적의를
    철회할 수가 없다

    먼지처럼
    나도 모르게 은밀히 쌓인
    시간들의 무례를
    용서할 수가 없다.
    - 박재도,「시계13」전문

    우리의 일상적 삶은 시간과 의식을 전혀 별개로 놓고 시간은 실증적인 원리로 이해하려고 하고 의식은 주체의 심리로 환원하려고 든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효율성, 공리성을 지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행동은 시계에 맞춰져야 한다. 시계에 쫓기며, 시계를 좇으며 사는 삶이 곧 일상적인 삶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며, 일상에서 추방당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시간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인간은 시간 바깥에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시간을 객관화시킨 것이 아니라 시간의 객체가 되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주체의 자리에는 일상의 시간이 자리하게 된다. 인간은 효율성과 공리성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시간에 맞서 시인은 온몸으로 저항한다. 이 저항은 불가항력의 저항임을 시인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당신은 어째서 저항을 하시죠’라는 물음에는 조소가 가득 담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 ‘적의’와 ‘용서할 수 없음’의 저항만이 또 살아 있음의 증좌가 되는 것을.
    우리가 시계를 보고 아는 시간은 비본래적 시간이며 일상의 시간이다. 이 도구적인 시간은 ‘목숨을 잘라 한 토막씩 들고/한꺼번에 시간을 계산하려’(「시계1」)드는 시간이다. 의식의 시간, 본래적인 시간은 ‘불도저를 몰고’(「시계2」)가는 시침이 분할하는 시간이 아니라 ‘별과 별 사이를 걷고 있는’ ‘태고’의 ‘아주 느린 걸음’(「시계7」)의 시간이다. 의식에서 추출되어 ‘주체’를 객체의 자리로 밀어내 버린 시간은 ‘나 하나를 위하여’ 결코 ‘저 커다란 바퀴를 멈추지 않’(「시계5」)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항’을 해야 한다. 겨울로 달려드는 시간에 저항하는 ‘나’는 끝내 ‘빨리가자 하’는 ‘시계’와는 달리 ‘천천히 가자하’는 ‘봄’(「시계22」)과 온전한 통일성을 회복하게 된다.

    3.
    일상은 역동적인 움직임, 시적 행위의 바깥이다. 역으로 시적 이미지, 시적 의식은 일상의 바깥 영역에서 발생하고 이루어진다. 르페브르의 말을 빌면, 일상은 추락의 방향도 아니고, 봉쇄나 장애물도 아니고 더구나 퇴행의 시․종도 아니다. 어울림이면서 엇갈림이고, 계단인가 싶으면 도약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이분법은 전혀 다른 것들도 하나로 뭉쳐내는 독특하고 강력한 결속력을 발휘하게 된다. 일상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고 또 모든 것이 따로따로인 것이다. 여러 순간들로 이루어진 한순간이며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상성의 한 지점에서 출발해야만 하는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인 것이다. 일상의 근원이었으나 이제는 일상에 의해 전설로 퇴락해버린 상상의 영역이 일상의 그림자로 자리한다. 이 상상의 영역, 시적 인식의 영역은 창조활동이 새로운 창조를 맞이하러 가는 역동적인 영역이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설이 되어버린 ‘숲 속의 마을’이 있다.

    고장난 자동차를 끌고 숲 속의 마을에서 네온사인이 춤추는 밤거리의 도시로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먼 길이었다
    도시에 찌든 삶을 버리기 위해 우리는 많은 날을 숲속의 마을에서 보냈다 지금도 아련히 떠오르는 숲 속의 마을 이골 저골 들어앉은 작은 집들 눈을 반짝이며 마음 푸르게 익어가던 아이들의 싱그럽던 웃음 새참이면 막걸리 잔을 건네오던 어른들의 투박한 손길에서 우리는 도시를 잊어갔다
    새의 명랑한 노래로 열리던 하루 하루의 정갈한 아침 기름진 흙의 어루만짐에서 달빛 일렁이는 서로의 가슴을 조심스레 더듬어 깊어가던 밤 우리는 조금씩 지루했다
    우리는 도시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내기 위해 느티나무를 베어냈다 그날 밤 둥지로 돌아온 새의 놀란 울음 소리로 마을의 모든 아이가 울어댔다
    어른들은 숲의 길 가운데 나무를 누가 베었는지 다 아는 양 움츠린 우리의 집으로 왔다 이내 차는 부서지며 길을 잃고 그들의 손에 낫과 도끼보다 눈빛이 더 날카로왔기에 우리는 가슴이 시렸다 낫과 도끼를 거두고 그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우리를 마을에서 밀어냈다
    시작되리라던 장마 그 빗속에서 후두둑 일어서는 풀에 종아리를 스치며 고장난 차를 고쳐 몰고 먼 도시로 돌아왔다
    오늘도 어지러운 음악이 춤추는 불빛 사이로 도시가 술에 젖어갈 때 빗물에 잠겨버린 숲 속의 달을 우리는 노래한다.
    - 안창현,「숲속의 마을」전문

    이 시는 액자식으로 구성된 시다.  ‘도시로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먼길이었다’로 끝나는 첫번째 문장과 ‘고장난 차를 몰고 먼 도시로 돌아왔다’로 끝나는 다섯번째 문장이 액자의 틀이 된다. 마지막 문장은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그렇게 보면 이 시는 서사적인 시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강한 서정적 울림이 퍼져 나온다. 이야기가 아니라 노래가 들려온다. 이 시의 의미가 발생하고 있는 두 번째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은 일상의 시간을 토대로 재구성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전설이 된 이야기이다. 즉 일상성 바깥의 영역에서 구성된, 일상의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전설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술에 젖’은 도시에서 우리는 ‘숲속의 달’을 이야기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전설은 이성적으로 이해되고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부르는 노래에 가깝다. 우리의 일상의 삶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 전설은 가로의 시간을 타고 과거로부터 흘러오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시인에게 현실은 ‘도시’의 다른 이름이다. 도시에서의 삶이 곧 일상의 삶이다. 시인에게 일상은 너무도 버겁다. 일상의 무게 때문에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과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 일상의 세계는 가로의 시간 위에 펼쳐진 세계다. 이 가로의 세계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떠도는’ 일이다. 떠도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직성이 필요하다. 시인에게는 솟아오르는 세로의 시간, 수직의 시간이 절실하다. 그래서 ‘그래 가벼운 새처럼 싱그럽게 저 하늘로 날아갈까 한 점 시든 꽃잎으로 툭 떨어질까’(「귀가」)라고 노래한다.
    안창현 시인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햇살’, ‘비’, ‘눈’ 등이 바로 수직성의 이미지들이다. 여기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이다. 그리고 수직성의 끝 부분에는 우주로 통하는 문인 ‘달’이 있다. 달은 오랜 전설이 되어 지금 머리 위에서 초승으로 열리고 그믐으로 닫힌다. 「반달」은 사랑하는 딸의 이미지와 겹치기도 한다. 이렇게 열리는 수직성의 길을 따라 시인은 「外界行星으로」가고자 한다.

    나는 지금 떠나고 있다 외계행성으로
    잠시 머물려던 지구에서 40년을 넘기다니
    세월의 빠름에 놀랐고 곧 외계로 타전
    귀환하라고 답이 왔다

    <중략>

    나는 지금 아름다운 별들 사이를
    흥분한 채 지나고 있다
    그러나 돌아오리라
    돌아볼 따뜻함이 있는지
    다시 와 찾으리라
    초록별에서
    별빛처럼 반짝이는 사람들
    - 안창현,「外界행성(行星)으로」첫연과 마지막연

    그런데 시인의 시선은 그렇게 떠나고자 했던 지구로 향한다. 외계행성은 시인이 떠나온 곳이었기 때문에 떠나가야 할 곳이 되었다. 외계행성에서 지구는 떠나온 곳이다. 그러니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 ‘별빛’은 지구에서 표류하는 ‘화자’를 외계행성으로 이끈 등대였다.  지금 ‘별들 사이’를 지나고 있는 ‘화자’에게 이제 별은 지구에서 사는 ‘반짝이는 사람들’이다. ‘초록별에서/별빛처럼 반짝이는 사람들'이 등대다. 다시 귀환한 초록별에 펼쳐질 새로운 서정의 세계, 그 서정의 세계에서는 ‘도시로의 귀환’이나 ‘초록별로의 귀환’을 전제하지 않는 시인의 여행에 동행할 수 있게 되어도 좋을 것 같다.

    4.
    시의 세계는 언어의 세계이며 일상의 의미와는 단절된 세계이다. 일상의 의미와 연속선상에서 시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면 살아있는 의미를 얻을 수 없다. 시의 이미지가 현실과 맺는 관계를 단호하게 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바슐라르는  이미지가 현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하는 밧줄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이미지일수록 이미지만으로 충분하다. 그 충만한 이미지가 일상의 이면에서 살아나 일상까지도 감싸 안을 수 있는 시적 의미의 장을 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일상 세계에서의 삶은 세계에 의존한다. 세계에 의존하는 삶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역할을 얼마만큼 잘 수행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주체의 가치가 쓰임에 따라서 판명되는 만큼 일상의 주체는 소비하는 주체이면서 소비되는 주체이기도 하다. 자기 안의 울림에 의해서 자신을 바로보지 못하는 주체는 늘 타인의 해석에 귀 기울이고, 그 외부의 소리에 의해 자신을 세우고 이해하고 평가한다. 더 적실하게 말하면 일상의 주체는 세계에 의해서 세워지고, 이해 당하고, 평가받는 주체이다.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이다. 남에 의해 해석되는 말들에 귀기울이는 ‘귀는 두 조각의 가죽에 불과하다’(「소음측정기」). 내 안의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안개 속에 피어오르는 시간의 느린 그림자를 조용히 걸’으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때로는 올 데까지 와버린 길끝에 서 있다고 일러줄’ 수는 능동적인 주체로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신덕룡 시인에게 ‘소리’는 곧 생명의 표식이요, 생명의 숨결이다. 시를 빚는 시인의 손길은 지상의 헤파이토스라고 불렸던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을 닮았다. 그 손길로 일상 속에서 타락한, 자본과 폭력에 의해 시원을 상실한 것들을 다시 빚어낸다. 이렇게 언어로 빚어진 것들에 시인은 소리를 부여해 준다. 현실감을 상실한 피그말리온의 무모한 사랑에 감복한 아프로디테가 상아로 만든 아름다운 여인상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듯. ‘정류장에서 숨을 고르는 심야 버스’(「고속버스터미널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어금니로, 꽉 깨물고 있는 소록도’(「너울너울소록도」)와 같은 구절들이 단순한 의인법을 뛰어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피그말리온과 그 아름다운 상아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 ‘파포스’가  수천년, 수천만리의 시공을 초월해 여기 달마산에서도 떠오르고 있다.

    눈 비비며 달마가 일어선다
    땡볕 아래서도 꼼짝 않던.

    지는 해가 아쉬운 듯 황금 빛가루 골고루 흩뿌리며 미황사 부도전 가까이 서 있는 나무들, 일제히 고개 숙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요를 덧칠하곤 한다.
    바람이 불어와 부드럽게 일렁일 때

    옹기종기 모여 있던 무덤들이 서서히 입을 연다.

    그 소리는 작아 이명처럼 저 혼자 울기도 하고, 때론 오래된 비문의 글자처럼 부서져 귓가를 맴도는 말씀이다. 이제는 가난한 자들의 시간, 귀 떨어진 옥개석 아래 소금기조차 사라진 거북이 물고기 바닷게들의 속삭임을 조용히 지켜보는 나도 한때 누리는 즐거운 외로움이겠다.

    조금이라도 마음 편해졌다면

    슬며시 생의 주름이 펴지는 소리
    투명하게 채운 달마산 검은 숲 위로
    막 등짐을 벗은 돌덩이 하나, 둥실 떠오르는 것 보리라.
    - 신덕룡, 「달마다 일어서다」전문

    해남 땅끝 미황사가 등을 기대고 있는 달마산은 봉우리마다 훤한 바위들이 달마의 이마를 닮은 것도 같다. 미황사는 특히 이름을 남기지 않은 고승들의 부도가 많은 절이다. 번뇌와도 같이 얽히고설킨 골짝골짝의 산길을 풀며 헤치며 걷다보면 마지막으로 닿는 절이 미황사라고 한다. 자기 안의 명경을 닦던 이들이 ‘서서히 입을’ 열어 내는 소리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두 조각의 귀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맑음을 지녔으리라. 그 깊고 맑은 생의 소리는 천년 세월을 옥개석에 새겨져 붙어있던 ‘소금기조차 사라진 거북이 물고기 바닷게들’까지도 살아나 ‘속삭’이게 하는 ‘말씀’이다. 그러니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즐거운 외로움’밖에. 그 외로움을 감내한 연후라면 ‘나’는 둥실 떠오르는 것들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 ‘나’를 포함하여 달마산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생의 주름이 펴지는 소리’를 딛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돌덩이로, ‘둥실’ 달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의 소리는 귀로 듣는 소리만이 아니다. ‘개구리 울음소리, 놀란 풀잎 고개드는 소리,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 속으로 사라진 길, 그 ‘길 밖에서 바싹 말라 뻑뻑해진 울음의 표정’은 ‘두 눈을 부릅뜬 귀’로 읽을 수 있다.

    눈을 감았다. 흰 꽃잎들이
    나비 떼처럼 몰려왔다.
    낡은 창틀이 삐걱대고, 오랫동안
    구석에서 잠자던 먼지들이 들썩여
    담쟁이넝쿨은 굳은 손을 풀기 시작했다.
    제 마음에 갇혀 겨우내 빈 들판을 가로지르던
    바람도 이젠 길을 낸다. 지금까지
    햇빛 아래 얼굴을 감추었거나
    굳게 입을 다물던 것들이 뛰쳐나와
    낯선 표정으로 웅성거리는 고요한 길이다.
    두 눈을 부릅뜬 귀는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넘어
    수상쩍은 소란의 그림자를 뒤쫓는다.
    심연의 어두운 그늘로만 파고들어
    뾰루지처럼 아프게 불 밝히는 것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득해지는 길 끝에 선다.
    눈을 뜨면 봄날의 꽃가루처럼 흩어질
    가볍고 부드러운, 눈부신
    불끈불끈 솟구치는 저 하찮은 것들!
    -  신덕룡,「길 끝에 서다 -소리감옥12」 전문

    일상 속에서는 하찮은 것들, 사소한 것들이 강력한 일상성을 구축한다. 생활계획표를 제 손으로 그리기 시작한 이후 일상성은 보잘 것 없는 것들로 차곡차곡 쌓인 난공불낙의 성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일상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상의 이면 역시 ‘저 하찮은 것들’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하찮음’의 질은 극과 극을 이루는 것이다. 일상의 이면, 의식의 세계를 채우는 ‘하찮은 것들’은 ‘굳게 입을 다물던 것들이 뛰쳐나와/낯선 표정으로 웅성거리는’ 제각각의 소리를 가진 것들이다. 또 이것들은 일상처럼 정교하게 짜 맞춰지기 위한 하나의 블럭이 아니다. 제 힘으로 ‘불끈불끈 솟구치는’ 것들이다. 일상의 그것처럼 전체를 강요받지 않은 홀로 아름답고, 함께 즐거운 것들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가볍고 부드러운, 눈부신’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이며, ‘눈을 뜨면’ ‘흩어’져 버리는 ‘보이는 소리들’이다.
    항상 말(言)은 글(語) 앞에 놓인다. 자아 바깥의 풍경은 눈으로 보지만, 안쪽의 풍경은 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안을 흐르는 의식의 강물로 시를 낚으러 가는 시인은 귀로 보고, 듣고, 만지고, 맡고, 맛볼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럴 수 있어야 ‘시원을 향해 거슬러 오르던, 날 선 언어’(「놀림낚시1-은어」)를 낚아 올릴 수 있으리라. 비로소 은어로 은어를 낚아 올리듯 시로 시를 낚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5.
    오늘날 여가 혹은 취미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르페브르는 여가를 두 가지로 구별한다. 일상성에 통합된 여가(신문읽기와 TV시청 등), 그것은 근본적인 불만족을 그대로 놓아둔 채, 이 여가를 즐기는 당사자는 분노나 자책으로 여가를 끝내기 십상이다. 또 하나의 여가는 출발의 기대, 단절의 요구, 도피의 염원으로서 사교․휴가․자연․축제․광기 등을 들고 있다. 소비사회는 풍요의 사회인 동시에 박탈의 사회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낭비로 치닫는가 하면 극단적인 금욕으로 치닫기도 한다. 다양한 이원성이 소비사회의 또 다른 일상성이기도 하다.
    소비는 우리를 만족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한다. 최고의 상품을 소유하자마자 그 상품은 금세 낡은 것이 되고 새로운 것이 최고의 자리에 놓인다. 만족도 주지 못하는 소비가 향유될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소비를 통해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때 찾아드는 것이 권태다. 권태로운 일상성을 깨트리는 ‘새로운 취미’를 이쯤에서 만날 수 있다.

    언젠가 실수로 접시를 깬 후 나는 매일 접시를 깬다 접시를 깨며 나는 비로소 접시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접시의 그 많은 무늬들은 어디서 오나 비로소 나는 접시에게 주소를 묻는다 가끔은 접시가 대답 대신 내 손가락을 찌른다 발가락을 찌른다 선명한 핏자국이 깨진 접시에 무늬를 새긴다 선명하게 붉은 꽃이 핀다 나는 깨진 접시의 주소가 된다 쨍그랑 내가 비명을 지른다 완벽하게 숨긴 모서리들을 와르르 쏟아낸다 나도 모르는 모서리, 낯선 주소, 낯선 남자…… 알고보니 그는 오래될수록 낯설어 지는 남편, 그가 내 오래된 찬장에 새 접시를 채우고 있다 그가 비로소 아내의 새로운 취미를 눈치 챘나 보다.
    - 김종미,「새로운 취미」전문.

    르페브르의 말을 빌면 시적 이미지의 특징은 새로운 언어 속에 한 영혼과 다른 영혼이 맺는 직접적인 관계, 말하고 들으면서 행복해하는 두 존재의 접촉에서 찾을 수 있다. 시에서의 동일성의 회복, 혹은 화해는 주체와 세계의 완벽한 일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와 또 하나의 나의 섞여듦을 통해 이루어진 서정 주체가 해석의 문을 열게 된다. 접시의 쓰임에 따라 접시에 음식을 담아내는 ‘나’와 원래의 태생인 흙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접시를 퇴락-깨뜨림으로서 ‘나’를 ‘주소’로 삼는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나’의 존재가 섞여 든다. 새롭게 변이된 접시들의 ‘비명’은 그래서 즐거운 탄성에 가깝다. 그렇게 탄생된 주체는 ‘내 손가락’과 ‘발가락’을 찌른다. 이것은 폭력이 아니다. 섞여듦일 뿐이다. 여기에 늘 부엌 밖의 타자로만 맴돌던 남편까지도 ‘눈치를 채’고 들어오게 되는 역동적인 ‘화해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다.
    ‘나’와 ‘또 다른 나’, ‘접시’와 ‘또 다른 접시’ 그리고 부딪치고 습합하는 열린 의미의 장에 독자는 ‘남편’의 모습으로 들어오게 된다. 독자는 현실 속에서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의식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의 입구에 막 들어선 것이다. 이 통로를 통해 독자 역시 ‘생의 의미’를 캐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발견된 내밀한 존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몽상이다. 몽상은 우주의 에테르와 같이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빛의 매질이 된다. 유체인 몽상은 일상에게는 제 몸을 집어 삼키는 늪이 되지만, 내적 존재에게는 솟구쳐 오르는 발판이며 길이 된다.
    영혼이 일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견고한 지반이 있어야 한다. 그 지반-지평에서 크게 숨을 고르는 영혼은 과거를 불러들일 필요도 없고 미래로 단번에 내달릴 필요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루소는 이와 같은 상태에서 ‘고독한 몽상의 산책’이 시작된다고 했다. 시간이 영혼에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영원히 현재가 지속하는, 그럼에도 그러한 지속은 드러내지 않고, 계기의 흔적도 없이,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다만 우리의 존재라는 감정만이 있어서, 그 감정만으로 영혼 전체가 충만할 수 있는, 그런 상태를 몽상이라고 한다. 루소는 이 몽상이 지속되는 한 거기에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오뉴월 땡볕에 붉은 털 스웨터를 입고 거리로 나온 여자’(「불타는여자」)는 일상 속에서는 ‘“그녀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와 달리 일상 너머에서 시인은 그녀를 두고 “그녀는 불탄다”라고 말한다. ‘딩동딩동……/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여’는 ‘몽유’는 꿈을 거니는 것이니 ‘몽상의 산책’과 다르지 않다. 몽상은 끊임없이 의식의 문을 닫는 행위이며, 또 끊임없이 의식의 문을 여는 행위이기도 하다. 열고 닫음은 순차적이지 않다. 여는 것이 닫는 것이고 또 닫는 것이 곧 여는 것이다. 그래서 ‘몽상’이다.

    펼쳐볼 수 없는 나는
    다리를 절며 다시 씨방 속 같은 밤에 닿습니다
    당신이 흘린 벨 소리가 수북이 쌓인 현관문을 열고
    거실 문을 열고 안방 문을 열고 창문을 열고
    잠을 열고 꿈을 열고
    딩동딩동……
    - 김종미,「몽유」마지막 부분

    내부에서 빛이 발할 때 주체는 더 이상 시간 바깥의 존재가 아니다. 시간의 주인, 시간 안의 존재가 되어 몽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는 일상의 현실 속에서 절대적으로 고립된 지위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헤겔은 시는 그 자신 살아있는 존재로서 현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살아있는 존재로서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시를 통해 몽상하고, 시와 함께 일상 너머에서 충분히 몽유할 수 있어야겠다.

    6.
    시는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최초의 평자의 임무를 부여받은 시인은 ‘자기’를 분석해야 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헤겔의 견해를 바슐라르의 말로 반복하자면 “존재의 통일성을 찾기 위해서는 모든 연령대를 한꺼번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박재도, 안창현, 신덕룡, 김종미 시인만큼 이 말에 적합한 삶을, 시를 사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늘 양가적이다. 한없이 두려워하고, 한없이 경멸한다. 매달리고 있으면 속물 같으면서도 무시하고서는 생활을 보전할 수 없다. 일상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일상에 목줄을 매고 있는 우리는 이 양 극단을 수직으로 가르며 열리는 특별한 현재의 지평을 이들 시인을 통해 만나 보았다.
    시와 시 아닌 것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창작열을 불태우는 전사와도 같은 시인들이 주류가 되어버린 듯한 시대다. 그들의 도전은 치열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그러나 시의 지평을 넓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시의 길은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깊어지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더 본질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본질’이라니! 필자의 이 고루하고도 낡은 시선으로 보자니 새삼 이 늠름하고 노숙한 시인들이, 날렵한 직관과 감정으로 농익은 시편들이 더 아름답고 값지다.  <끝>


    약력:
    1970년 전남 화순 출생. 2003년 ≪시와 정신≫ 신인상 수상. 전남대 국문과 박사 수료. 문학박사. 현재 원광대 문창과 강의교수. 계간≪문학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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