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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란의 이건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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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736회   작성일Date 06-12-14 17:06

    본문

    시원을 향한 상상력
    이건청론

    김성란

    1. 유추적 사고로의 귀환

      시는 정서를 드러내는 문학 양식이다. 그런데, 현대 인간들의 삶이란 정서를 느낄 사이도 없이 기계에 밀리지 않기 위해 이분화된 단편적인 담론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러나 시원의 사고는 신화체계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의식적인 사고를 통해 세계와 대응할 수 있는 ‘자발적인 인간형’을 형성한다. 자발적인 인간은 다양한 시각과 반응을 통해 정교하고도 복잡한 세계상을 구축해 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여러 정신 구조들을 구축하여 이것들이 세계와 닮아 있으면 닮아 있을수록, 세계를 이해하기가 용이해진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사고의 유연성으로 다양한 정신 구조를 구축해내고, 그 정신 구조의 모습이 세계의 모습과 닮아 있을 때 일상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야생의 사고는 다양한 사고의 유연성을 통해 다각적으로 사고한다는 측면에서 ‘유추적 사고’라고 정의할 수 있다.
      ‘유추적 사고’가 작동하는 내용은, 문화의 모든 구성원들이 암암리에 양해하고 있는 일련의 구조적 대비와 대립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구조적 대비와 대립에서도 그들 간의 차이가 서로 닮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 간의 대비와 대립에서 닮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추적으로 연관되어진다. 우리들은 기존의 우리들의 세계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대립들 간에서 유추적인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각 문화가 지각하고 있는 개개의 현실의 성질을 명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현대 서양의 자연관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를 이분법의 잣대로 가름해 왔다. 따라서 이분법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어떤 가치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무용지물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유추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야생의 사고를 따른다면, 이 세상에는 이분화할 수 없고, 그 경계를 나눌 수 없는 존재들이 너무도 다양하게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세계를 넘나드는 이야기

      이건청의 시는 우리가 현재 잃어버린 시원의 사고 체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토테미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던 원시인들은 만물과 자연을 다양한 형태의 영혼의 생성물로 보았다. 이러한 사고는 그들의 삶을 보존해 온 기본적인 사고체계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사고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면서, 문명과 야생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체계에 의한 분리를 거부한다. 따라서 보편적인 인간정신으로서 모든 예술과 문학의 영역에 포함되어 현재에도 명확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음 시에서는 설화적 이야기를 기억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인간정신을 일깨운다.

    파도가 높은 날이면 깊은 바다 속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기인 소리가 우웅, 우웅, 울렸다. 세상에서 제일 깊은 곳, 검은 물 휘도는 거기, 사랑의 격정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큰 종을 배에 싣고 건너는 격랑의 바다가 있고, 한 여자와 남자가 부딪쳐 울리는 큰 종을 실은 배는 그 험난한 바다를 건너 신혼의 집에 닿아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 종은 세상에서 제일로 맑고 밝은 소리로 울려야 하는 것이었는데, 안개 속 격랑을 헤쳐 가던 배들이 이따금, 지남철을 잃고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하는 것이었는데, 배가 난파되고 나면,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종은 깊은 바다 속으로 갈아 앉아버리고 말았다고 하는데, 파도가 높고 안개가 짙은 먼 훗날, 깊은 바다 속 어딘 가에선 이루지 못한 채 바다 속으로 침몰해 버린 사랑의 말들이 다시 녹슨 쇳소리 되어 우웅, 우웅 퍼져 나오곤 하는 것이었다.

                                                             「심해에서 울리는 종소리」 전문

      이 시는 설화적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 준다. 바다 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버린 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종소리는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파장을 보내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대립구조는 부딪쳐 깨지고, 대립을 벗어나 종을 만든다. 종소리는 여자와 남자가 하나의 기호가 되어 울부짖는 의미를 드러낸다. 그 의미는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험난한 바다를 건너 신혼의 집에 닿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염원은 원하던 대로 실현되지 않고, 바닷속 깊은 곳에 가라 앉아버리고 말았다. 파도도 넘볼 수 없는 곳, 안개조차 근접하지 못하는 깊은 바다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한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곳, 그곳은 하나의 생명체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다양한 생물체의 기원이 되며, 사랑의 씨앗이 계속 만들어지는 곳이다. 이 ‘바다’는 공간적 개념을 지니면서도 시간적인 영원성을 형상화해 낸다. 시간적 영원성은 태초로부터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 이러한 영원성의 시간은 인간들의 삶을 기계적이고, 이분화된 삶의 구조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제공한다.
      사랑이 완성되지 못하고 난파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의 전통적 정서인 ‘한’을 환기시킨다. ‘한’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이 ‘한’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힘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 준다. 인간의 의지와 사랑이라는 진실도 거대한 자연의 섭리를 이겨내지 못한다. 다만, 인간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한’이라는 정서적 깊이에 묻을 뿐이다.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 깊이만큼 자신들의 사랑을 깊게 간직한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점이 바닷속에 내장되는 순간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나왔듯이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자연에 귀의함으로써 사랑의 진실은 마침내 완성되고, 지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랑의 소리를 ‘웅웅’ 보낸다. 우리들의 귀에 닿은 사랑의 소리는 ‘쇳소리’로, 혹은 알아듣지 못하는 ‘웅웅’거리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논리적 사고로 듣지 못하는 소리를 기억 속의 설화를 상기함으로써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형 어조는 어떤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종’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부딪혀서 만든 하나의 결실이다. ‘부딪혔다’는 의미는 단순한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부딪힘을 통한 고통과 찢어짐, 깨달음, 양보,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치열함 속에서 키워진 사랑이 종을 만들어내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낼 수 있다. ‘바다’라는 공간에 갖혀 있는 ‘종’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갖혀 있는 시원의 기억을 상기시켜 준다. 종소리가 울려 퍼져 인간에게 닿을 때, 비로소 시원의 사고는 기억의 저편에서 건너와 인간의 영혼을 일깨운다.


    정영호 이 사람 어찌 왔나, 문학청년 시절 좁은 방에 마주 앉아 하이얗게 밤을 새우던 내 문학담의 경청자, 내 시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자, 고고학 전공의 서울대학생, 나중에 자네는 해군 대위였었다. 1976년 1월인가 간 경변으로 병이 들어 해군 제4병동에 누워 있더니, 영 가망이 없다고 퇴원해서, 소방서가 보이는 자네 집 문간방에 누워 있더니, 아파서 견딜 수 없으니 몰핀 주사라도 구해다 달라고 핏발선 눈으로 내게 말하더니, 나중엔 한 줌 흰 재 되어 한강 하류, 행주산성이 건너다보이는 강물에 뿌려진 자네, 출렁이는 강물 속, 말풀들에 실려 간 자네가 이 새벽 옛날의 고무신을 끌고 왔구나, 구두를 잃어버린 채 역전 거리를 헤매는 내게, 줄이 끊긴 검은 전화 수화기만 뒹구는 역전, 텅 빈 마당을 헤매며 살아가는 내게 자네가 왔네, 강물에 실려가 황해가 되었는지 남해가 되었는지 수평선 너머 안 보이는 섬 기슭에 철썩이는 물거품이 되었는지 늘 궁금하던 자네, 자네가 왔구나, 30년도 넘는 시간을 헤치고 내게 와 밤새 흩날렸구나. 나 구두를 잃고 역전 빈 마당을 헤매는 새벽, 자네가 왔네, 자네가 날 찾아와서 양촌리 내 집 지붕을 하이얗게 덮고 갔네 그려.

                                                                       「새벽 눈」전문

      위 시에서 화자는 눈이 온 아침에 비로소 망자의 넋을 본다. 생과 사의 뚜렷한 구분점이 존재함에도 화자는 망자와 단절된 세계에 사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자네라는 호칭을 통해 망자의 육신이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망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도 내 삶을 흔들고 다닌다. 내가 구두를 잃어버린 채 역전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에도 나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와 화자인 ‘나’를 바라본다. 그는 타인과 의사소통 매개체가 끊어진 채 텅빈 마당을 헤매며 살아가고 있는 화자에게 다가와 하얀 빛으로 말을 건넨다.
      ‘나’는 그동안 ‘자네’를 궁금해 하면서도 나 자신조차 정리하지 못 하고, 30년의 세월을 흘려 보냈다. ‘시’를 쓰는 직업을 가졌기에, 타인의 가차없는 비판에 항상 후회와 안타까움을 가지고 살았다. 나의 삶에 다시 찾아온 ‘자네’를 통해 비로소 나를 찾아 길을 떠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해 ‘자네’가 했던 질문을 상기하게 되고, 지나간 30년을 돌아본다.
      위의 시에서는 인간의 생의 마침을 간결하지만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생명을 다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 생명이 소진되고 나면, 강물에 뿌려지든 흙속에 묻히든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 존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 어떤 모습으로라도 ‘눈’과 같은 형상으로 인간 세상에 돌아올 수 있다. 따라서 영의 세계에 밝은 눈을 가진 시인은 인간과 영혼의 세계를 들여다 보고, 그것을 통해 인간 세상의 삶을 충실히 하고자 한다. 위 시에서 화자는 생과 사의 두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토템적 사상은 바로 이렇게 본래의 이질적인 세계의 벽을 허물고 인간들의 분리된 의식 세계를 넘나든다. 이러한 사상은 논리적 사고를 벗어난 유추적 사고에서 기인한다.
      인간들이 과학적 사고로 생과 사의 세계를 구분하고 이름 붙임으로써 과학적 지식에 더욱 길들여져 가는 순간에도, 시인은 살아 있다. 과학이라는 거대 담론이 만들어내는 이분화된 사고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영적인 존재와 대화를 나눈다. 그럼으로써 인간 내면에 아직까지 잠자고 있는 야생의 본능을 일깨우고, 논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프랑스 문인협회는
    프랑수와 오퀴스트 르네 로댕에게
    문인협회 회장 발자크의 전신상 제작을 의뢰하였다.
    로댕은 먼저 발자크의 소설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발자크의 고향을 여러 번 찾아 그 풍광에 젖었다.
    발자크의 편지와, 사진과 석판화를 모았다.
    발자크를 이뤄낸 하늘과 바람과
    물과 흙 속에서 견고한 정신이 된
    발자크를 찾아낸 다음, 몸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중략

    ‘문인협회 기념사업회는
    로댕 씨가 살롱 전에 전시한 이것을
    발자크의 인물상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비대한 괴물, 형체 없는 뚱보,
    우아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중략
                                        「예술가의 뜰」 부분

      위 시에서는 대립의 규칙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기성들의 작품과 로댕의 작품, 로코코 시대의 장식물과 로댕의 생동감 있는 조각물, 우아하고 고상함 대신 순수한 몸과 정신은 대립의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로댕은 조각이란 귀족 취미에 영합하여 그들의 정원을 장식하거나 건축에 종속되어 건물 일부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조각에 감정과 사실감을 불어넣어 로코코적 장식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현실과 거리가 먼 고대의 신화나 성서 이야기가 새로이 일어난 자유 시민의 희로애락과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로댕의 생각은 바로 시원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드러내 준다. 그는 다양한 의식적인 사고를 통해 세계와 대응하며 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적극적인 인간형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로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의 자발적인 인간은 다양한 시각과 반응을 통해 정교하고도 복잡한 세계상을 구축해 낼 수 있다. 따라서 로댕은 당시의 예술적 조류와는 다른 사고 체계를 통해 또 다른 예술세계를 구축해 낼 수 있었다.
      인간들은 규칙과 법률을 만들고, 국가라는 거대 담론과 권력 체계를 통해 이질적인 담론과 규칙을 거부한다. 로댕이 살았던 시대에 로댕의 작품은 거부당했다. ‘문인협회’라는 거대 권력과 담론은 로댕의 작품을 거부하고, 발자크의 인물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로댕은 힘없는 개인으로서 자신의 의지와 열정을 자신의 정원에 보관할 수밖에 없었다. ‘우아’와 ‘고상’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가치를 논하는 거대 담론과 ‘진실’이라는 가치를 놓고 볼 때 진실의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은 거대 담론과의 시간 싸움에서 이기게 되고, 몇 년 후 재평가를 통해 새로운 가치 체계를 형성하는 담론을 만들어 낸다.

    3. 여백으로 꿈꾸는 세상


    완당은 제주에 귀양 와서 8년을 살았다. 완당이 제주 대정에 머물며 먹을 가는 8년 동안 짐승들이 완당의 하늘을 지켜 주었다. 봄이면 푸른 용이 동쪽하늘을 지켰다. 여름엔 붉은 새가 남쪽 하늘을, 가을엔 서쪽 하늘을 흰 호랑이가, 그리고 겨울엔 검은 거북이가 북쪽을 지켜주었다. 하늘의 복판은 황룡이 지켜주었다. 완당의 하늘엔 또, 다른 별들이 떠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는데 처녀자리, 천칭자리, 전갈자리, 궁수자리, 염소자리, 물병자리, 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게자리, 큰물뱀자리같은 것들이 28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깊은 밤, 완당이 차를 끓이면, 작설 잎에 스며있던 그 별빛들이 조금씩 녹아나곤 하였다. 제주 산방산 쪽에서 불어온 거친 바람이 매화 향을 흔들고, 늦게까지 남아 있던 마지막 별들까지 스러져가면서, 화선지를 적시곤 하였는데, 거기 텅 빈 여백 위, 가느다란 윤곽만 남은 집 한 채와 소심해에서 울리는 종소리나무와 잣나무 너덧 그루 만 호젓하였다      
        
                                                                          「세한도」전문

      위의 시는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선조들은 장소와 풍수에 따라 땅 속에 흐르는 정기를 받아 인간의 삶에 부귀복수(富貴福壽)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완당 김정희는 55세에 안동김씨 일파들의 시기로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제주에 유배된다. 당시 출세가도를 달리며 병조참판을 지내던 50대의 완당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학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는 제주에서 오로지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열중했다. 선비정신을 소나무에 비유한 세한도가 탄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는 유배 경험을 통해 비로소 인생의 유한함과 자연의 영원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제주시절에 완성된 추사체의 매력은 해서․행서․예서의 각각의 개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9년간을 낯선 풍토와 음식, 질병과 정신적인 외로움을 견디면서 학문과 예술 세계를 완성시켜 후대인들에게 다각적인 사고와 삶의 표본을 만들었다.  
      완당의 삶을 소재로 한 위의 시를 살펴보면, 작가 이건청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시 쓰는 작업을 통해 현시대와 역사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최근에 환경 문제로 인한 현대 사회 문제를 지켜보면서 이 시대의 어두움을 고발하고, 미래를 지향하고자 했다. 그런 그의 삶의 의지는 완당의 세한도와 의미를 함께 한다. 이건청 시인은 완당이 짐승들과 자연의 기운으로 새로운 세계를 지향했던 삶을 기억해 내고, 자신의 소망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건청이 사는 이곳의 현실은 짐승들이 살아 숨쉬며, 그들의 기운으로 인간들에게 복을 주고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현대는 그들의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을 수 없으며, 타고난 생명이 소진될 때까지 살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삶 또한 기계 문명의 쳇바퀴에 치이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달려갈 뿐이다. 그러니, 세한도의 주인공처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과는 분리된 이상 세계일 뿐이다. 이건청은 자신의 시세계를 문명이 사라진 자리에 텅 빈 여백으로 그려놓음으로써 우리들에게 다양한 의식 세계를 열게 한다. 문명이 사라지고 난 후 가느다란 윤곽만을 그려가는 인간의 삶을 제시하여 소나무와 잣나무의 정기를 되살려 내고자 한다.


    개미지옥엔 개미귀신이 산다. 그냥 질펀한 모래밭, 거기 지옥이 있다. 모래빛깔의 작은 벌레, 개미귀신이 모래를 움푹 파고 개미지옥을 만든다. 개미귀신은 제가 만든 지옥의 제일 깊은 곳에 몸을 숨긴다. 가장 민감한 촉수, 더듬이만 내놓고 기다린다. 새벽이슬이 스치고, 풀잠자리가 여뀌 풀 무성한 개울가 그늘 속에 날개를 접을 때까지, 저녁노을을 헤쳐 간 까막까치들이 제 둥지에 닿을 때까지, 별이 지고 새벽달이 이울 때까지 굶는다. 개미지옥으로 먹이가 다가서고, 벼랑으로 먹이가 굴러 떨어질 때까지, 개미귀신은 개미지옥에 숨어 기다린다. 마른 시간의 한 귀퉁이에 숨어 기다린다. 개미귀신은 개미지옥에 산다. 개미지옥이 그의 집이다. 개미귀신은 거기서 자고 거기서 꿈을 꾼다. 개미귀신은 벼랑을 꿈꾼다.  
                                                              「개미지옥에 사는 사람」전문

      개미귀신은 명주잠자리의 유충이다. 알에서 깨어난 유충은 무생물체인 모래밭에 자신의 집을 만든다. 아무것도 없는 무생물체로 보이는 모래밭에서 모래빛깔의 벌레는 가장 민감한 촉수와 더듬이만을 내놓고 개미를 기다린다. 그는 개미지옥에서 한 마리의 명주잠자리로 화하는 순간을 꿈꾼다. 지금 개미귀신이 처해 있는 곳은 개미지옥이고, 명주잠자리로 화했을 때 개미지옥을 벗어나 좀 더 이상적인 세계로 날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개미귀신이 가파른 벼랑에서 꿈꿀수록 천국은 그와 거리가 멀다. 개미지옥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콘크리트 숲이다. 아무리 민감한 촉수와 더듬이를 내놓고 기다릴지라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떤 변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꿈꿀 뿐이다. 그 꿈은 허황되고 환상적이어서 하늘과 닿지 못하는 벼랑에 존재한다. 이런 사실은 알고서도 인간들은 새벽의 마른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더 넓고 적극적인 세계를 발견해 내지 못하는 개미귀신은 너무나 소극적 인간형이다. 그는 “새벽이슬이 스치고, 풀잠자리가 여뀌 풀 무성한 개울가 그늘 속에 날개를 접을 때까지, 저녁노을을 헤쳐 간 까막까치들이 제 둥지에 닿을 때까지, 별이 지고 새벽달이 이울 때까지 굶는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기본적 욕구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얻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 삶의 형태를 그린다. 현대인들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고, 그의 예정대로 행동한다. 개미귀신의 삶은 비참하고 안쓰러워 보인다. 어떤 욕구도 채울 수 없는 꿈의 한 자락만을 붙잡고, 세상을 기다린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사고로는 눈에 보이는 개미귀신이 명주 잠자리로의 변태를 설명할 수 없다. 개미귀신이 유충의 탈을 벗고 유유히 날아 올라 넓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까지에는 개성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다각적이고 개성적인 시각을 보유한 인간들만이 명주 잠자리의 세계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거대한 가치 체계와 겨루어 마침내 승리할 수 있는 진실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건청은 자신의 30여 년간의 시작 활동에서 이러한 의지를 다짐하고,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따라서 그의 사고 체계는 다양한 의식적인 사고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화에 대한 관심과 망자에 대한 회상과 해후, 우리나라 예술인인 완당 김정희, 프랑스의 조각가인 로댕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은 시간과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폭넓게 전개되었다.
      이건청의 시 「심해에서 울리는 종소리」, 「새벽 눈」, 「예술가의 뜰」, 「세한도」, 「개미지옥에 사는 사람」에서 화자는 모두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대상과의 주관성을 극복하면서, 객관적으로 대상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화자와 대상의 거리감은 사물의 개성을 그대로 바라보게 해 준다. 이 다섯 작품들에는 “종(남자와 여자)”, “정영호”, “로댕”, “완당”, “개미귀신(그)”이 등장한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위의 대상 중 “개미귀신”만이 시인과 동일시될 수 있는 인물이다. 동일시된 ‘그’라는 존재는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다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모두 시인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인물로, 시인과는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존재했던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모두 다양한 의식적인 사고를 통해 세계와 대응한 자발적인 인간형들임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는 통합의 세계라기보다는 분리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물질 문명의 발달로 인해 시원의 세계에서 지녔던 다양한 사고체계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시원의 상상력과 다각적 사고 체계는 현대인의 잃어버린 꿈을 다시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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