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시와정신국제화센터
로그인 회원가입
  • 시와정신
  • 시와정신 공간
  • 시와정신

    시와정신 공간

    김문주의 우리시대의 시정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댓글 122건   조회Hit 3,127회   작성일Date 06-12-14 17:11

    본문

    교만한 자폐(自斃)와 시의 현실

    김문주


    20세기 초 현대 예술의 성격을 논하는 자리(『예술의 비인간화』ㆍ1925)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 José)는 예술의 비인간화 현상을 지적하며 예술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을 시대적인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는 빠르게 부상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대중과 이들로부터 차별화되려는 엘리트 집단 사이의 갈등을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성향이 예술 영역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면서 자기 내부로 유폐되는 비인간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순수예술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다시 말해서 겸손한 태도이다. 인간적 감정을 떼어낸 예술은 중요하다는 ‘것’을 전혀 못 갖는 예술이 되고 만다. 즉 예술이라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 예술, 바로 그 자체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라며 예술의 자폐 현상을 비판한다. 순수 예술이 인간성에 대한 회복이나 삶의 예술화를 지향한다면 <예술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 예술>은 삶과 예술을 분리함으로써 예술 행위를 특정 영역으로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현대 예술에 대한 오르테가 이 카세트의 진단 이후, 기술자본주의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사회적 현실이 빠르게 변하면서 문학을 비롯한 각종 예술의 성격이나 사회적 위상도 현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90년대 미국의 앨빈 커넌(Albin Kernan)은 예술 가운데 문학을 철저하게 사회적 산물로 조명하면서 대학에서만 유통되는 당대의 문학은 매우 위축된 상태로 지속되다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음을 여러 사회적 현상을 들며 입증한다(『문학의 죽음』ㆍ1990). 그에 따르면 산업자본주의와 인쇄문화에 바탕을 둔 문학은 영상문화시대에서 필연적으로 그 위상이 추락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으며, 그 소생 가능성 역시 오직 사회적 현실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소생 가능성이란 고전 작품을 영상문화에 걸맞게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문학의 성격과 위상 변화의 원인을 문학 예술의 내부적인 문제에서 접근했던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달리 앨빈 커넌은 문학의 위기를 사회적 변화에 의해 구축되는 사회적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진단한다.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커지고 개별 영역의 독자성이 붕괴되는 오늘의 현실을 고려해볼 때, 문학 현실에 대한 진단과 가능성을 문학장(文學場) 내부나 사회 일반의 변화 문제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앨빈 커넌의 주장이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문학은 사회적 현실의 일부이지만 단순히 현실을 구성하는 하위 영역으로 머물지 않고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현실 사회를 충격하고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예술의 비인간화’ 현상에 관해 우려하거나 엘빈 커넌이 ‘문학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은 사회 현실에 대한 문학의 영향력이 자의에 의해서건 혹은 현실의 변화에 의해서건 현격하게 위축ㆍ상실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이 진단하고 있는 문학의 위기란 쌍방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관계로의 변화를 의미하며, 그것은 문학이 사회적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역할을 문학 종사자 스스로가 축소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실이나 대중과의 소통에 적극적이지 않고 철저하게 ‘예술 영역에만 국한된 작품’을 창작하려는 문학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종전의 문학 장르가 상대하기 어려운 현실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문학 예술의 위상 변화는 문학의 제도화 과정이 사회적 현실 속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된 서구와 달리 단기간에 심한 변화의 과정을 경험한 한국이나 일본에서 좀더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의 문학은 현실의 억압과 질곡을 돌파하려는 사회적 상상력으로 기능해 왔으며, 그 중심에는 부정한 현실을 교정하려는 윤리학적 이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이기적 본능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적 현실을 넘어서려는 도덕적 의지였으며 인간에 대한 믿음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문학의 위기가 출현한 90년대가 대안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급속하게 힘을 상실한 시기였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한국문학의 흥성기가 사회윤리라는 실천적 사유의 장으로서 기능하였음을 시사한다. 최근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 고진의 진단(『근대문학의 종언』ㆍ2005) 역시 이 지점을 주목한다. 고진은 과거의 문학이 차지했던 지위는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감당했기 때문임을 강조하면서 이제 이 과제로부터 해방된 문학은 단순한 오락에 불과한 것이기에 근대문학의 역사적 기능이나 소임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선언은 한국문학의 현실을 중요하게 반영한 결과였다.
    앨빈 커넌이 주로 활자문화에서 전자문화로 전이되는 기술자본주의의 전환 과정을 기존 문학 형식의 주된 종말 원인으로 삼은 데 반해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문학인 내부의 태도 변화를 문학의 현실적 위상 변화의 원인으로 생각한다. 그가 현실 사회의 중요한 과제들에 대해 아무런 역할을 떠맡지 않으려는 문학 현장을 분석은 하되 비판하지 않으려는 것은, 추상적인 언어 속에 유폐되고 있는 작금의 문학판이 그 안의 역학관계 속에서 관성화될 것이며 현행제도 안에서 그럭저럭 유지될 것이라는 냉소적인 전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의 종말>이 아니라 <근대문학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며 근대문학이 사회적 기능을 다한 현재의 문학 현장에서 떠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문학의 위상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선보인 앨빈 커넌과 달리 가라타니의 선언에는 겉으로는 담담하지만 매우 깊은 안타까움이 깔려 있으며, 그 중심에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깊은 윤리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고진이 문학의 소생 가능성에 관해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것은 근대문학이 담당했던 과제에 대해 아무런 자의식이 없는 문학은 더 이상 문학(근대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매우 강력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의 종말을 바라보는 앨빈 커넌과 가라타니 고진 간의 태도의 차이는 작금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시각차에서 비롯된다. 앨빈 커넌이 탈산업화되고 있는 기술자본주의 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탐색하고 있는 데 반해 가라타니 고진은 거대한 자본의 현실로 인해 빚어진 사회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모색한다. 다시 말해 전자는 현실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는 데 반해 후자는 수정되어야 할 세계로 인식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앨빈 커넌은 문학작품을 철저히 상품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고진은 자본주의를 성찰하는 현실조정의 가능태로서 파악한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것은 현재의 문학이 더 이상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이다. 문학의 위기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견해차는 근원적으로 문학작품의 가치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문학에 대한,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신념(?)에 가깝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고진이 말한 사회윤리적 기능의 폐기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과연 그것이 문학 내부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현실적 변화에 따른 필연적인 것인지에 관해서.
    우리의 경우, 문학은 삶에 대한 성찰이나 사회학적 상상력을 진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인쇄문화에 바탕을 둔 문학 작품의 수용은 본질적으로 삶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통찰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해 왔다.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통해 삶의 다양한 국면을 경험하고 여러 가지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와 사유를 진행시켜 왔다. 특히 질곡의 현대사를 통과하면서 한국의 문학은 현실의 문제들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윤리적ㆍ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다양한 언어적 실험과 새로운 형식을 모색한 전위적인 작품 역시 난해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작업을 통해 기존의 상투적인 사유를 전복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삶과 현실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대하는데 일조했다. 문제는 오늘의 현실에서 문학의 이러한 사회적 기능이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인지, 그리하여 문학의 용도 변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인지를 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찰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의 문학은 그야말로 <우리들만의 문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그저 하나의 제도로서 사장(死藏)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문학, 특히 시문학은 현상적으로는 매우 풍요로운 양상을 보인다. 지역별 시전문지가 탄생하고 많은 신인들이 배출되고 새로운 문학상들이 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양상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양적인 풍요로움이 문학의 영역을 확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동호회 수준의 자족적인 성격으로 전락해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시단의 한쪽에서는 자폐적인 문학 언어들이 소통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한쪽에서는 동어반복의 유사한 시들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다. 제도권 교육에서 논의되는 근대시편들, 그리고 사람들의 삶과 소통하지 못한 채 문학작품이 유통되는 현실은 문학의 영역이 확실히 위축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문제적인 것은 이른바 ‘언어의 카니발화’ 현상이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성세를 이루면서 시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시에 접근하려는 독자들의 관심도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서정적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감각과 관능에 기초한 환상의 언어들이 언어의 공공성을 의식하지 않은 채 쏟아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시가 보여주는 언어의 실험들이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하는 점이다.
    1980년대에 출현했던 다양한 실험적 시편들은 기존의 관성에 충격을 줌으로써 현실과 시에 대한 인식의 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한 시편들은 기존문학의 관심 영역이 아니었던 대중문화나 일상의 영역들을 현실 구성의 중요한 재료로 삼음으로써 언어의 민주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였다. 이 새로운 시들은 낯설었고 부분적으로는 난해했지만 독자를 쫒지 않았으며, 실험적이었지만 자폐적이지 않았다. 이들의 언어적 실험은 현실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었으며 문학 대중으로 하여금 문학 언어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최근의 시편들에는 그러한 실험적 언어들을 운영하는 궁극적인 전략들이 실종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언어는 자기 내부에 유폐되어 있어서 스스로 사회적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의 다양한 코드들을 활용하고 대중문화의 감성을 부분적으로 담고 있지만 대중들의 접근 자체가 어렵고, 전문독자들은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에서 의미 있는 가치들을 별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1> 토요일 밤9시 ‘리빠똥’에서/우리는 소진되었고. 문은 오로지/패배한 자를 위해 열려 있어./10년이 지났을 뿐인데//크레모아 들고 적진에 뛰어드는 용기./우리의 만남. 부자연스런 체위. 시와 혁명./우리와 그들의 사랑은 소도미야./소돔 성이 소도미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어./사랑의 힘 때문이야. 서풍이 분다.//혁명이 뭐겠어. 우리 결혼할래.//헬로와 헬로와 꽃들이, 헬로와 헬로와 우리들에게,/청첩을 돌린다면. 너와 나의 결합./오래된 진리와 형체 없는 유행의 결합./내 삶은 recycled life. 폐기해줘. 철폐해줘./모든 법칙들을, 모든 용기를, 사랑의 만용을./질풍노도의 시대. 그 시대의 아들이./헤이 걸. 큰 젖을 가진 아가씨. 날 위해 울어줘./이봐. 웨이트리스. 천 하나 더.//지하철공사 노동자들. 술을 마시고 있어./파업 철도. 강철의 힘이란 옛날의 추억이라구./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아름다운 여인 메텔./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 역에 멈춰서면/차량 기진엔 햇빛이 가득했네./투쟁하는 노동자의 눈동자./그런 시대. 그런 아득한 날들 앞에/항복하고 싶다.//사랑은 어째서 고독하고,/나는 어쩌라고 약한가./유일한 동력. 유일한 실존./달콤한 알콜과 마리화나, 플라워 무브먼트./살아 있는 무뇌아. 정주를 거부한 nomade에게/치욕의 힘, 생존 본능의 아름다움이 무늬 진//창 너머 도시의 어둠에/꺼지지 않는 불빛의 술렁임 첫 파정의 현기증처럼/퍼져 오르고 늦은 사랑의 강이 흐르고/강 건너에는 잊었던 어둠이 흐르고/그 어둠 속엔 긴 겨울 끝/새 봄 기다리는 마른 희망들/忍冬하고 있고 숨어 죽는 나뭇가지/끝에는 순백의 희망이……

    <2> 창밖의 뚜렷한 현실. 거대한 뿌리의/숨막힘 멀리 떨어져 있는. 언제나. 어둠./은유의 시대는 끝났다. 여기/명확한 언어라는 모조품./친구여. 혁명이 아름답던 은유의 날들을/내게 돌려줘. 청춘을. 부서진 내 청춘을. 꽃다운/우리 청춘 술잔 위에 떨어지는 불빛, 불빛./불멸하는 이름. 사랑의 짝짜꿍으로./낫과 해머. 핀란드역의 블라지미르. 역사의 기관차. 계급의 두뇌./ 무너진 사랑탑에//눈이 내린다//너와 나 사이 폐허에/우리를 지켜보는 투명한 눈이  
              ― 장석원,「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전문

    위의 인용한 시편은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작품과 부분적으로 유사한 성향을 띠고 있지만 이전 시기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포섭하면서 시대의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시적 주체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구성 방식은 자유연상과 다양한 인상경험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시적 주체의 발화들 사이로 다양한 문화적 내용들이 삽입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언어적 연상에 의해 혹은 발화의 무게를 보강하려는 의도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발화의 내용들이 서정적 주체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주체가 휘발된 방식으로 시의 언술들이 짜여져 있는 것은 현재를 구성하는 다양한 힘들, 그리고 그 중에 어떠한 것도 주도하지 못하는 혼란한 내면 현실을 드러내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이러한 원리는 이른바 환상적인 시편들의 내면을 이루는 특질이다. 이러한 특징이 그것 자체로 목적이 된 듯한 최근의 젊은 시편들과 달리 장석원의 작품 속에는 발화들을 이어가는 주체의 내적인 동선(動線)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시인이 통과한 80년대의 역사의식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모색이 내장되어 있다. 이러한 고민은 장석원의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혁명에 대한 사유와 닿아 있고 그것은 김수영의 시적 방법에 대한 갱신의 욕망과 관련된 듯하다. 단속되면서 이어지는 이 시의 발화에는 80년대의 역사적 상상력에 대한 시인의 다양한 내면들이 노정되어 있는데, 한편에는 막강한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회의가 한편에는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낮은 희망에 대한 감상이 담겨 있다. 문제는 모자이크식 발화를 통해 구성한 이 시의 혁명과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며, 그것이 품고 있는 우리의 역사적 과거가 시인의 내면에서 진지하게 되물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물음은 이 시의 발화 방법과 언술들이, 그것이 환기하는 내용을 온당하게 떠받칠 수 있는 것인가에 관한 회의이기도 하다. 이 점은 최근의 젊은 시인들이 시적 방법으로 취하고 있는, 즉 서정적 주체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탈주체적 언술들이, 시적 언어가 감당해야 할 사유의 무게를 방법적으로 회피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와 관련된다. 이러한 혐의를 위의 인용시와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긴 겨울 끝 새 봄 기다리는 마른 희망들”이라는 출처의 진정성을 되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히려 “혁명이 아름답던 은유의 날들”의 붕괴 이후를 철저한 파탄의 절망으로 노래하고 있는 다음의 시편이 좀더 시적인 가능성과 잠재력을 내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은 변하고/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네/아이들은 자라/수염자리 거뭇한 낯선 얼굴이 되고/훤칠하던 어른들은 하나둘 떠나갔다네//저 눈보라 죽음의 길 십년 백년을/걷고 또 걸어, 우스워라, 다시 제자리/감옥과 무덤과 증오의 길/아아아아 게 누구 없소! 거기 누구 없소! 소리쳐봐도/있은들 무엇이겠나/절망으로 칠갑한 너와 같은 자/눈썹에 수염에 혹한의 고드름 달고 제 부모 처자 눈 속에 까마귀밥으로 장사지낸 자/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육신 하나 지고 갈 곳도 머물 곳도 땅 위에는 없는 자//바랜 흑백사진 속의 풍경과도 같이/저 끝없는 눈보라의 시간이 묵묵히 말하네/모든 길은 죽음 속에 갇혔노라고/말하네, 지상의 길은 사라졌으니/갈 테면 새가 되어 날아가라고
             ― 김사인,「YOL」2-4연

    이제는 매우 낯선, 그리고 오래된 시절에 관한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시편은 서정적 주체가 보여줄 수 있는 극한 절망으로 뒤덮여 있다.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달라진 세상,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의 세월은 시인이 자주 쓰는 ‘속절없다’는 표현만큼이나 이러한 감정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치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사는 것처럼 달라져 버린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린 화자의 고조된 절망감은 우리 시대에서 더 이상 만나기 어려운 낭만적 격정을 드러내고 있다.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것에 모든 것을 헌신하려 한 의지로 충만했던 낭만주의 세기는 이 시를 읽는 지금의 우리의 느낌처럼 너무도 생경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 감정은 우리 시대의 것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사인의 이 작품을 돌아보는 것은, 앞의 시편이 지적으로 탐색하려는 혁명과 사랑이 그것을 진정으로 꿈꾸었던 윤리적 감성을 동반하지 않을 때 결코 구체적이고 진정한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한번 고백하건대, 나는 김사인의 위와 같은 시편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시대의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 그리고 이 작품이 탄식하고 있는 지나간 시대의 낭만적 의지 속에 내재되어 있던 윤리적 감성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시적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굉음 속
    도시고속도로 갓길을
    누런 개 한 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말린 꼬리 밑으로 비치는 그의 붉은 항문
                                               ― 김사인,「귀가」전문

    “고속도로 갓길을” 걷는 “누런 개”, 그 개의 “말린 꼬리 밑으로 비치는” “붉은 항문”을 보는 시인의 시선은 행간에 내장된 여백처럼 깊고 절실하다. 이러한 시선이야말로 구체적인 생명 존재들에 대한 진지한 윤리적 내면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붉은 항문”을 바라보는 순수한 생명 감정은 어찌 보면 우리를 낭만적 격정 속에 머물게 했던 그 “은유의 시대”가 남겨 놓은 “거대한 뿌리”일지 모른다. “바랜 흑백사진 속의 풍경”같은 그 “은유의 시대”는 그 속을 살았던 개인의 내면과 관계없이 궁극적으로 ‘두뇌의 기획’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지상의 길”을 모두 걷어갔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은유의 시대”가 그토록 증오하고 넘어서고자 했던, 철저한 자본의 사막 속에 갇혀 있다.
    시는 ‘문학의 죽음’을 선언한 앨빈 커넌의 지적처럼 사회적 현실 속에 놓여 있다. 그 현실은 기술자본주의가 구성해 놓은 세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내면이기도 하다. 시는 활자문화에 바탕을 두고 출현한 예술 장르이지만 시를 필요로 한 심성은 결코 활자문화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어떠한 문화적 영역도 시에 요청되었던 감수성을 온전하게 담당하고 있지 않다. 시는 본질적으로 씌어진 것을 읽는, 분명히 자신을 의식하는 개인에 의해 향유된다. 대중문화ㆍ전자영상문화시대가 사람들의 감수성을 변화시키고 있고 그것이 문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에 부정적인 요소임은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시는 사회적 현실 속에 놓여 있지만, 그 현실은 소비상품으로서 기술자본주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하는 방향 속에 있지 않다. 시는 전자영상매체와 달리 현실의 평면 속에 펼쳐지지 않고 시를 감상하는 사람의 내면에서 재구성된다. 이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재구성의 과정을 통해 시는 생성되고 움직인다. 시가 자기사유와 반성을 동반하는 활자문화의 자식임은 시에 주어진 운명이다. 그렇다면 시가 놓여 있는 현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 현실이며,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길이다.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흰 열무꽃이 파다하다/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가녀린 발을 딛고/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문태준,「극빈」전문

    위의 작품은 이 시대의 사회문화적 현실 속에서 시에 요청되는 중요한 덕목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심미적 체험과 윤리적 감성이 만나는 지점을 매우 섬세한 내면을 통해 보여주면서,「극빈」의 시인이 오늘날 대중과 평단에 두루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를 생각해보게 한다. 물론 한때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시가 반드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좋은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화적 전환기인 이 때에 이 시인에 쏟아지는 공공의 관심과 반응은 우리 시의 길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시인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열무밭에는 “흰 열무꽃”만 “파다하다”. 소작 없는 채소밭에 무성하게 핀 열무꽃 앞에서 시인은 편안하지 못하다. 그것은 노동이 투여되어야 할 곳에서 만난 뜻밖의 심미적 풍경에서 진정한 미적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망설인다. 그때 열무꽃잎에 앉아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는 나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풍경은 시인을 지극히 내밀한 자기반성 속에 잠기게 한다. 조용한 풍경 속에 진행되는 시인의 이 그윽한 반성은 시적 체험이 어떻게 인간적인 감수성을 동반한 미적ㆍ윤리적 경험인가를 잘 보여준다. 말의 결을 따라 시인의 마음을 밟아가는 감상자들의 내면은 이 그윽한 풍경 속에 담긴 윤리적 감성을 자기 것으로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영상전자문화가 주는 즐거움과 시의 감동은 이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영상문화는 감각적인 선명함으로 인해 매우 직접적이고 강렬한 효과를 유발하지만, 시는 감상자의 체험과 상상력을 통해 작품의 향유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감상의 과정이 보다 역동적이며 수용자의 내면에 작용하는 심리적 영향력이 깊고 넓다. 시의 수용은 본질적으로 감상자의 사유의 과정과 상상력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내적이며 자기반성적이다. 시의 위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가 현실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줄 수 없지만 그것이 혁명이 될 수 있는 것은, 시는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스스로 성찰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낡고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시에 관한 이 전언을 떠올리며, 나는 시에 내장된 시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인간의 무한 욕망을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 시대에 시와 문학만큼 감상자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하게 만들 수 있는 예술 장르는 없다. 시가 아무리 영상문화의 이미지를 시적인 방법으로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시가 주는 즐거움은 영상문화의 재미를 따라 갈 수 없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내면을 대중문화의 방법을 차용하여 구성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재미나 지적 통찰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어로 구성되는 순간 지독히 재미없는 유폐된 난해함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소통되지 않는 언어는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시적 언어의 전략은 그 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때 무의미하고 전략의 목적이 비어 있을 때 공허해진다. 시의 현실은, 갈수록 거세지는 이 기술자본주의 시대를 소비상품으로서 살아남으려 할 때 흐려질 것이며, 이 현실을 거스를 때 비로소 열리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평가하려는 자본의 욕망을 성찰하는 길이야말로 시의 길이며 시의 현실이다.
    (끝)



    김문주 : 문학평론가, 2001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재 서울산업대학교 강사.  
    연락처 : 010-9909-7522, 전자우편 : moon1711@hanmail.net
    주  소 : 서울시 성북구 정릉4동 정릉풍림아파트 101동 1001호(우136-77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