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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해옥의 명시 깊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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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783회   작성일Date 06-12-14 17:22

    본문

    자의식의 발현과 통찰의 시
    김승희, 『냄비는 둥둥』(창작과비평사)
    전기철, 『아인슈타인의 달팽이』(문학동네)
    문태준, 『가재미』(문학과지성사)
    김 홍 진


    1. 자의식과 통찰
    세 시인의 시집에 대한 서평을 의뢰받았다. 작가의 개성과 자의식이 살아 숨쉬는 곳이 작품임을 잘 알면서도, 그래서 헛된 기대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필자는 은근히 이들 시인들의 시집에 어떤 공통분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시대의 시와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미학은 단일하고 균질적인 지형으로는 형상할 수 없는 다양한 스펙스트럼을 형성하고 있었다. 세 시인의 시집에는 각 시인이 스스로의 세계를 갱신하고 부단히 자기 영토를 확장하는 시적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그래서 어떤 공통성을 찾기 힘든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그들의 시적 경향을 하나의 축약된 형도(形圖)로 바꾸어 사유해야 하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작품이 작가가 세계와 관계하면서 작가의 개성이나 자의식을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때 편한 마음으로 어떤 뚜렷한 공통성이 내재하기기를 기대하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문학의 전체적 양상이 서로 다른 차이와 개성, 다양한 빛깔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밑변을 흐르는 저류라 할까, 서로 공유하고 있는 내적 연결의 끈을 찾는 것까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서로 달라 보이는 단절과 그 단절 속에서 서로 연결된, 그러니까 연속적 단절, 혹은 단절적 연속은 공시적으로든 통시적으로든 문학이 갖는 운명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자의식의 발현과 존재의 통찰이라는 이름으로 김승희, 전기철, 문태준 시인이 근자에 펴낸 시집을 만나려 한다. 이때 자의식이란 자아가 세계, 또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면서 맞이하게 되는 모순과 부조리, 혹은 결핍과 부재를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실존적 조건으로 인정하고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극복의 정신, 견딤의 의식을 말한다. 현대시는 근대적 자아를 확인하는 과제로서 속악한 세계와 자기 자신을 마주하면서 그러한 현실로부터 자신을 도피시키지 않고 그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를 확인하고 존재를 통찰해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어떻게 세계와 관계하고 자아를 바라보며 존재를 성찰하고, 이러한 가운데 자의식을 어떻게 더욱 풍요롭게 산출해내고 있는지 살펴보자.

    2. 비극적 세계와 구원의 세계 : 김승희
    김승희 시인은 첫 시집 『태양미사』(1979)에서 이번의 아홉번째 시집 『냄비는 둥둥』에 이르기까지 비극적 세계에서 탈출하여 사랑과 구원의 세계에 이르려 하는 시적 여정을 줄곧 노정해 왔다. 이러한 그의 비극적 세계 인식과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시적 기획은 역설적이며 역동적이고, 비극적이며 경쾌하고, 종교적이며 동시에 광기어린 상상력을 동반하면서 현대시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번 시집 『냄비는 둥둥』 역시 그가 줄곧 보여주어 왔던 비극적 현실인식과 그것을 돌파하려는 의지, 그리고 그러한 비극적 세계에서 사랑과 구원의 세계를 탐문하는 고투의 산물로 보인다. 시인은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 찬 비극적 세계에서 경쾌함과 활달함, 유머와 역설, 주술적 신비와 음악적 리듬의 활력을 통해 성과 속, 종교적 초월과 거룩함, 세속적 욕망과 광기까지 넘나들며 분방하게 시적 상상력을 펼친다. 분방한 상着쩜 채, 삶에서 완전히 차단되는 것임을 이상은 위의 시에서 잘 보여준다.  
      다음의 시는 파국으로 인식하는 이상의 죽음의식을 유희적인 어조로써 표현한 작품이다.

                  ―自家用福音―
                  ―惑은 엘리엘리라마싸박다니―

        하얀天使  이鬚髥난天使는큐핏드의祖父님이다.
                      鬚髥이全然나지않은天使하고흔히結婚하기도한다.
        나의肋骨은2다스(ㄴ). 그하나하나에노크하여본다. 그속에서는
       海綿에젖은더운물이끓고 있다. 하얀天使의펜네임은聖피-터-라고.
       고무의電線 똑똑똑똑  열쇠구멍으로盜聽.
                  버글버글
        (發信) 유대인의임금님주무시나요?

        (反信) 찌-따찌-따따찌-찌-(1) 찌-따찌-따따찌-찌-(2) 찌-따찌-따따찌-찌-(3)
        
        흰뺑끼로칠한十字架에서내가漸漸키가커진다. 聖피-터-君이
       나에게세번씩이나알지못한다고부정하는찰나. 瞬間닭이활개를친다……
              앗 더운물을 엎질러서야 큰일―
                       -「內科」 전문

      위의 시에서 십자가의 ‘예수’는 내과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인 ‘화자’에 상응하고 예수를 배반한 ‘피터’는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없는 ‘내과 의사’에 상응한다.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었을 때, 예수는 하느님에게 가능하다면 자신에게 닥쳐 있는 죽음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함으로써 죽음 앞에서 불안에 떠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한편 예수의 충직한 使徒였던 피터(베드로)는 자신의 목숨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고 따랐던 예수를 모른다고 자신을 잡으러 온 병사들에게 말한다. 이 같은 성서의 이야기는 신념과 현실의 현격한 간극을 보여준다. 예수는 정작 죽음을 맞는 순간에 하느님에게 자신의 구원을 청했고, 바오로 역시 죽음 앞에서 그동안의 모든 신의를 저버리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인간이 부딪치게 되는 죽음의 불가해한 위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이 「內科」에서 성서의 이야기를 원용하여 드러내고자 했던 것도 죽음의 위력 앞에서 지극히 무력한 인간의 위상이다. “유다야사람의임금”인 예수는 병원의 진찰대에 누워 죽음에 임박해 있는 화자 자신을 지칭한다. 화자는 의사가 청진기를 자신의 몸에 대고 진찰할 때, 자신의 몸이 ‘발신’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몸은 의미 없는 反信만을 보낼 뿐이다. 생명의 회복을 희망하는 화자의 바람과 화자의 육체는 단절되어 있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화자인 나의 희망은 죽음 앞에 놓이게 된 육체가 가지는 현실과 대립한다. 죽음이 닥친 육체의 현실에서 나는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희망과 현실 사이의 통신은 차단되어 있다.
      하느님의 천사로 표현된 “하이한천사”인 의사는 피터에 비유된다. 그러나 피터가 예수를 모른 척 했던 것처럼 의사는 화자의 바람과는 무관하다. “순간닭이활개를” 치며 울 때에야 화자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서 죽음을 거두어 줄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흰뺑끼로칠한十字架에서내가 漸漸키가커진다.”라는 시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화자의 키가 점점 자란다는 것인데, 키가 자란다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화자의 자의식이 팽창되는 것을 의미한다. 병원의 침대에 누워 회생의 방도를 전혀 찾지 못하고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화자의 불안감은 점점 극대화 된다. 성 피터인 의사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리라는 기대감이 시간이 흐를수록 소멸되고 대신에 죽음에 대한 확연한 인지로 바뀌게 된다. 의사를 향한 화자의 심리적인 기대와 의지가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순간이야말로  화자가 죽음 앞에서 지극히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순간닭이활개를” 치는 시간은 닭의 활갯짓으로 활기를 띤 시간일 것이지만, 화자로 하여금 강하게 죽음을 인지하도록 하는 시간이다. 이 순간에 생동감과 도약의 표상인 ‘날개짓’의 의미는 모두 제거되고, 칠흑 같은 절망감 속으로 나는 함몰된다. 화자가 누운 하얀 침대인 “흰뺑끼로칠한십자가”로 표현된다. 예수에게 ‘십자가’는 처형대의 의미를 벗어나 희생과 구원을 상징하지만, 그러나 구원의 의미가 제거된 「內科」의 ‘십자가’에는 죽음의 의미만이 부각된다.
      이상은 「內科」에서 죽음을 유희적인 태도로 다룬다. 그러한 자세는 위기에 처한 자신의 육체를 객관화시킨다. 나아가 희극적으로 상황을 전환시킨다. 죽음의 문전에 서 있는 자신의 무력감과 그 누구도 상황을 바꿀 수 없음을 인식하는 데서 발생하는 자괴감이 ‘유희’의 자세로 역설적으로 표출된다.
      이상의 경우, 폐결핵은 ‘소모되어 가는 것’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상의 시에서 각혈 이미지는 살아있는 육체가 극적으로 죽음을 체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육체에서 진행되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폐결핵에 따른 咯血-은 화자에 의해 거리를 둔 채 관찰된다. 각혈은 폐결핵의 말기 증상이다. 이상이 생존했던 1930년대 폐결핵은 죽음과 등가를 이루는 질병이었다. 각혈 증세는 결핵을 앓는 환자로 하여금 죽음의 징후를 매순간 확인하도록 만든다. 자신의 죽음을 살아있는 자신의 육체에서 확인한다는 것은 전율할 만한 공포를 초래한다. 전신의 권태감과 나른함, 발열과 체중감소, 수면 중의 흥건한 식은땀 등의 증세는 환자가 죽음의 문턱에 점점 다가가는, ‘몸이 닳아가는’ 느낌을 체험하도록 한다. 이상의 시에는 각혈 이미지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폐결핵의 가장 뚜렷한 증세인 각혈은 어떠한 증세보다도 죽음을 강렬하게 체험하도록 한다.
      
      캄캄한空氣를마시면肺에害롭다. 肺壁에끄름이앉는다. 밤새도록나는옴살을알른다. 밤은참많기도하드라. 실어내가기도하고실어들여오기도하고하다가이저버리고새벽이된다. 肺에도아츰이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젔나살펴본다. 習慣이도로와있다. 다만내侈奢한책이여러장찢겼다. 惟悴한結論우에아츰햇살이仔細히적힌다.영원이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아츰」전문

      밤은 질병을 앓는 육체가 소모되어가는 시간이다. 밤을 지내는 동안 시간의 흐름은 화자의 육체를 점점 쇠진케 한다. 그래서 “밤은참많기도하드라”의 많은 밤은 죽음으로 가까이 갈 수밖에 없는 화자의 처참한 심정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화자에게 밤의 시간, 즉 육체적인 고통의 시간은 밤이 많다고 화자가 토로하듯이 육체를 파괴시키고 소모시키는 시간이다. 그런 밤이 지나가고 새벽을 거쳐 드디어 화자는 밝은 햇살이 비추는 아침을 맞는다. 화자는 아침의 밝음 속에서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자신의 육체에서 생명이 점차 소진되어 가는 것을 밤사이에 체험했던 것과는 무관하게 관습-일상-은 변함없이 내 앞에 놓여 있다. 밤새 피폐해진 나의 육체 위에 비치는 명랑한 아침 햇살은 무심할 정도이다. 다만 파괴의 밤을 대신하여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 내 앞에 “관습”적으로 놓여 있을 뿐이다. 그 변화 없는 일상이 위장된 것임을 나는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아침은 밝은 빛으로 지난 밤의 잔혹함을 위장하지만, 각혈의 흔적을 숨길 수 없다. 폐병을 앓고 있는 내가 겪은 밤사이의 육체적 고통, 그 흔적을 여러 장이 찢겨 나간 “내侈奢한책”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폐결핵을 앓는 화자가 喀血을 한 흔적이 찢겨져 나간 책이다. 책이 여러 장 찢겨졌음은 내가 각혈을 할 때, 찢어서 사용한 횟수를 뜻한다. 내 육체의 훼손을 위장하는 아침 햇살은 오히려 나의 육체 위에 내려진 “유췌한 결론”을 자세히 노출시키는 빛이다. 아침 햇살은 화자에게서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거두어 갈 것처럼 밝다. “영원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그러나 호흡할 수 있는 생명의 코가 없는 밤, 죽음과도 같은 밤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화자 자신의 바람은 무위하다는 것을 화자는 아침의 적나라한 햇빛 아래에서 확연하게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길고 지루한 밤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생명의 소모를 체험한 나의 육체 위에 환하게 비추는 햇살은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를 쫓는 밝음이 아니라, 나의 육체적인 죽음을 나의 육안으로 확인케 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밝음의 심상은 점점 소진되며 죽어가는 내 육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상은 자신의 육체에서 진행되는 죽음을 유희하는 자세로 다루기도 하지만, 그런 유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는 역설적 ‘포오즈’이다. 이상의 시 「아츰」은 죽음에 근접한 시인의 불안을 절실하게 노출시킨다. 이 작품은 죽음을 비켜갈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공포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의식을 보여주는 이상의 다른 작품들보다 죽음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 자아의 심각한 위축감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이상은 보편적으로 ‘생명성’과 ‘활기’를 의미하는 아침의 ‘밝음’을 밤의 ‘어둠’과 ‘죽음’의 이미지와 상치시켜 배치한다. 그러나 「아츰」에서 아침의 본래적 의미가 완전히 전복됨으로써, 밤과 아침이라는 대조적인 이미지의 결합은 밤의 ‘어둠’을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결과를 갖는다.  

       門을암만잡아단여도않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즈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작구만減해간다. 食口야封한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노아다고내가收入되여들어가야하지않나. 집웅에서리가나리고뾰족한데는鍼처럼月光이무덨다. 우리집이알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壽命을헐어서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여달렷다. 門을열려고않열리는門을열려고.  
                        -「家庭」 전문

      「家庭」에서도 밤은 화자의 육체를 닳게 만드는 시간으로 나타난다. 화자의 몸은 밤에 제웅처럼 자꾸만 작아진다. 여기에서 제웅이란 무당이 앓는 사람을 위하여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환자의 옷을 입혀 산 永葬(安葬)을 지내는 데 쓰는 것이다. 화자가 자신을 제웅과 같다고 여기는 것에는 자신이 누군가 앓는 이를 위하여 환자의 형상을 하고 길가에 내버려진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위의 시에서 앓는 이는 내 문패가 달린 우리집으로 나타난다. 나는 “생활이모자라는”, 즉 생계가 곤란한 나의 가정을 위하여 길가에 버려진 액막이용 짚인형과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 빈곤한 나의 가정을 대신하여 나의 육체는 열리지 않는 문 밖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닳아서 작아진다.
      이상의 시에서 밤은, 시간의 흐름을 곧 소모로 인식하는 이상의 시간의식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시간적 배경이다. 이처럼 소모로 인식되는 밤의 시간 속에서, 또한 서리가 내리는 추위 속에서, 나는 나의 육체가 모두 소진되기 전에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쇠사슬늘어지듯” 매달리는 필사적인 몸짓을 한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나는 식구들을 위하여 길밖에 버려져서 육체가 닳아가는 시간을 낱낱이 체험할 수밖에 없는 제웅이다. 나는 이 같은 내 몸의 소진을 막지 못한 채, 소모의 시간이 내 육체 위에서 흘러감을 절망적으로 감지할 뿐이다.
      또한 위의 시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생명이 소진되어 가는 존재는 나뿐만이 아니다. 나를 액막이용 제웅으로 삼고 있는 나의 앓는 집(가정)도 역시 수명을 헐어서 전당잡히는 존재로 나타난다. 나의 집도 그 생명성이 점점 소진되어 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빈곤한 나의 집은 앓는 육체를 가진, 수명이 소모되는 육체로 형상화 된다. 이처럼 공간, 혹은 사물을 육체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은 이상 시의 두드러진 특질이다. 문을 열 수 없는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앓는 나의 집이 생명을 상실해 가는 참담한 과정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나와 나의 집은 단절된 채,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력이 점점 감소되어 간다. 나는 나의 육체와 나의 집이 완전히 소멸로 향하는 밤의 시간 속에서 절망할 뿐이다.    

       기침이난다. 空氣속에空氣를힘들여배앗하놋는다. 답답하게걸어가는길이내스토오리요기침해서찍는句讀을심심한空氣가주믈러서삭여버린다. 나는한章이나걸어서鐵路를건너질를적에그때누가내經路를디디는이가있다. 압흔것이匕首에버어지면서鐵路와열十字로어얼린다. 나는문어지느라고기침을떨어트린다. 우슴소리가요란하게나드니自嘲하는表情우에毒한잉크가끼언친다. 기침은思念우에그냥주저앉어서떠든다. 기가탁막힌다.
                         -「行路」전문    
      
       나의 삶은 답답한 행로로 이미 정해져 있다. 아픈 기침으로 구두법을 찍듯 걸어가는 것이 삶의 길이다. 나의 행로에 힘들게 찍는 句讀는 “공기가주믈러서삭여버린다”로 알 수 있듯이 나의 발걸음이 삶에서 의미 있는 행동이나 사건으로 기억되지 못한다. 내가 걸어온 걸음은 소멸되어 버린다. 의미가 누적되지 않는 삶이지만, 화자가 한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아픈 기침을 해야 할 만큼 고통스럽다. 고통이 답답할 만큼 천천히 전개되는 나의 길에 누군가 출현한다. 갑작스런 존재의 출현으로 나는 걸어가던 균형을 잃는다. 그때 터져나오는 기침은 비수에 베어지는 아픔을 동반하고 나는 무너지면서 기침을 떨어뜨린다. 나의 격렬한 기침 소리는 “웃음소리”에 비유된다. 이상은 요란하게 터지는 기침 소리를 ‘웃음소리’로 바꾸어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이 같은 반어적 표현은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육체를 대상으로 삼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육체의 고통과 그것을 의식하는 행위의 분리는 “독한잉크가끼언‘치는 각혈의 순간, 극한의 비참에 빠진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나의 절망적인 의식이다. 이 같은 육체적 고통과 그것에 대한 시적 자아의 의식적인 분리는 기침이 점점 격해지다가 마침내 “기침을떨어뜨리”고 “毒한잉크가끼언”치는 각혈 과정을 힘들게 책을 읽는 과정과 병치시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내 경로에 갑작스럽게 들어서는 사람이란 바로 내가 내 육체의 파국을 강하게 지각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비수로 베어지는 듯한 육체의 고통과 함께 나는 무너진다. 이상의 시 「內科」에서 살펴본 “순간닭이활개를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격렬한 기침 끝에 각혈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각혈이 ‘생명’을 뱉어내는 것과 같은 것처럼, 내가 삶의 행로를 걸어온 시간은 내 삶이 점점 소모되어 온 과정이었으며, 내가 죽음에 점점 더 가깝게 다가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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