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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와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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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댓글 330건   조회Hit 2,583회   작성일Date 06-12-18 21:25

    본문

    화자와 청자

                                       김  완  하(시인․한남대 문예창작과 교수)


                        1

    시를 쓰는 일도 화자가 청자에게 말하는 방식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시 창작에 있어서의 시인도 가상의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현실의 상황이 아닌 상상을 통해 창조해 낸 새로운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시인과 시에서 화자의 목소리는 구분하여 읽어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시에서 일정한 태도와 목소리를 지니는 시적 화자(persona)로 변형되어 등장한다. 시적 화자는 시에서 그에게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어울리는 역할을 한다. 시인은 그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적절한 화자를 설정하여 그의 목소리로 시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목소리와 역할은 시적 화자의 개성을 드러낸다.
    한 편의 시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tone)와 역할에 의해서 세계와의 관계를 나타내며 시의 성격을 드러낸다. I. A. 리챠즈는 이 목소리를 화자의 청자에 대한 태도로 정의했다. 즉 어조는 시에 있어 간접적으로 태도를 표현하며, 태도는 톤을 결정하고 톤은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도란 시인이 전하려는 내용에 대한 화자를 통한 견해이며, 그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바를 반영하는 견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살핌으로써 시인의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정시는 개인의 체험을 토대로 한 내적 고백의 장르라고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서정시는 서사시나 극 양식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적어도 이 세 가지 양식이 담화(discourse)의 일종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성을 갖는다. 극 양식이나 서사 양식은 물론이고, 서정 양식도 화자와 청자 사이에 언어를 통해 진행되는 의사 소통의 일종이다. 물론 시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할 때 더욱더 강력한 대화의 상황이 설정되기 마련이다. 반면에 때에 따라서는 화자와 청자가 시의 문맥에 잘 나타나지 않고 의미 안에 스미어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시가 사물이나 물질과 같은 즉자적 존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기호체로써 작용하기 위해서는 화자와 청자가 말을 주고받는 대화적 상황이 설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담화의 시각으로 규정하고자 한다면, 서정시 또한 대화적 구도가 기본적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한편, 바흐찐은 모든 담화가 연극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가 있다. 그에 의하면 시적 담화도 시인과 독자 그리고 작품 속의 인물들이 기본적인 배역으로 존재하는 작은 연극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하여 각 작품은 어느 것이나 독특한 화법을 가지고 있다. 화법이란 화자의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말을 엮어 나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작품의 어조와 형태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에서 화자의 어조가 시인의 인격과 태도, 그리고 청자와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나타내게 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시를 하나의 메시지 전달 과정으로 이해할 때, 중요한 요소는 시인과 독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 오고가는 메시지이다. 이미 야콥슨은 이러한 관점에서 문학을 언어학적 소통구조로 밝혀놓은 바 있다. 그는 문학을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전언(message)의 전달로 파악하였는데, ‘전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수신자의 능동적인 역할을 중요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흐찐은 야콥슨이 사용한 ‘전언’이라는 용어를 ‘언술(담화)’로 이해함으로써 발신자와 수신자, 담화 내부의 화자(시적 화자)와 피화자(청자)의 관계가 진정한 대화의 관계라고 주장하였다.
    S. M. 체트먼은 작품 안에서의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좀더 세부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 보자.

    어머니는 집 가까운 콩밭에 김을 매시고 저녁이 되어서야 맨발로 호미와 고무신을     들고 돌아오셨지요. 우물가 빨랫돌 위에 고무신을 닦아 놓으시고, 하루의 피로를 씻     으시던 저녁, 땅거미가 내릴수록 더욱 희게 빛을 발하던 어머니의 고무신. 어머니의     땀 밴 하루가 곱게 저물면 이제 막, 우물 안에는 솔방울 만한 별들이 쏟아지고 갓      피어난 봉숭아도 살포시 꽃잎을 사리는 것이었지요

    지금 우물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싱싱한 꿈 길어 올릴 두레박줄 내릴 곳     없는데, 이제는 그곳에 서보아도 뒷산 솔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나의 저 어린      시절 어머니의 흰 고무신이 빛나던 저녁, 우리 집 우물에서 솟아나던 별들은 다 어     디로 간 것일까요
                        - 김완하의 「별들의 고향」 전문

    위의 시에는 아래와 같은 실제 시인과 내포 시인, 화자 그리고 청자, 내포 독자와 실제 독자의 관계가 드러나고 있다. S. M. 채트먼은 이미 텍스트 안에 화자와 청자의 대화가 기본적으로 상정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Real Author  → Implied Author → Narrator → Narratee → Implied Reader → Real Reader
      김완하       시인 김완하   화자(소년) 청자(어머니)    독자 A           A

    위에 인용한 시 「별들의 고향」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나타난다. 이 시는 2연으로 구성된 연시로 1연의 시적 화자는 소년으로 등장하며 청자는 어머니이다. 1연에서 시인은 자신의 유년을 회고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어린 날의 한 순간을 떠올리면서 유년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 시에 등장한다. 시인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어린 날의 한 순간을 너무도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있다. 2연에 이르면 시인의 목소리는 현재 시인의 목소리로 옮겨간다. 그러나 이 시가 어린 날의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어조는 경어체를 쓰고 있다. 1연의 청자보다 2연의 청자는 독자 일반으로 확대되어 있다.
    이 시의 주제는 1연과 2연 사이의 변화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1연과 2연 사이의 시간은 적어도 20여 년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향의 우물이 사라짐으로써 그 안에 비치던 별들이 사라졌다고 하는 아이러니와 이 시의 어조는 동심적 발상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별들의 고향」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인의 삶과 환경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현대인들이 상실한 자연과 고향의 문제를 제기해주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문학 행위 속에 독자의 참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재래의 문학 감상에서는 독자들이 독서 행위에서 수동적 관망의 자세로 시인에게 귀를 기울였다면, 이제는 직접 텍스트 안으로 파고 들어가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만큼 독자의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인 자세가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문학 텍스트를 읽는다는 사실은 작가와 독자와의 대화라는 점이 강조되는 것이다.
    시에서의 담화는 화자와 청자를 기본적으로 전제한다. 서정적 양식도 이러한 담화의 한 형태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에는 화자와 청자의 말을 주고받는 대화적 상황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통화체계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시 이해의 통로를 모색한 사람은 로트만(Iu. Lotman)이다. 로트만은 시의 통화체계를 두 가지로 제시하였다. 그는 시의 통화체계를 나-나(I-I) 통화체계와 나-남(I-YOU, HE, THEY) 통화체계의 두 가지로 파악하였다. 나-나의 통화체계는 화자인 내가 나 자신과 내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경우인데, 독백의 통화체계로 이루어진 많은 작품들이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나-남의 통화체계는 통화질서의 대표적인 형태로, 화자의 메시지가 공간을 이동하여 청자에게 전달되는 통화체계이다. 그러나 시인마다 각자가 즐겨 사용하는 통화체계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시인이 어떤 통화체계를 사용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화자와 청자가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있느냐에 따라 텍스트의 성격은 매우 달라지게 된다.

                        2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도 화자가 청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의 일종이며, 어떻게 그 상황을 이끌어 가느냐 하는 것이 곧 그 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설정하여 한 편의 시를 완성시키려는 노력은 시 창작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방향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대단히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서정시는 개인의 체험을 토대로 한 내적 고백의 장르로 인식된다. 서정시는 직접적인 발언이나 강력한 메시지의 전달에 목적을 두지 않고, 상황의 제시나 정서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정서적으로 젖어들게 한다. E. 슈타이거가 서정적 양식을 회감(回感)의 방식으로 이해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는 체험을 토대로 쓰여지기 때문에 그 체험의 시간적 토대는 과거이고 그것을 회상하면서 출발한다. 시를 쓰는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시에는 두 겹의 목소리가 겹쳐 등장하게 된다.

    구멍난 검정 고무신 두 짝 사이로 바라본 하늘
    고무신 안에 골 좁게 놀던 중태기 새끼는
    어느새 새어
    고무 타는 연기처럼 하늘에 놀고 있었다

    피라미처럼 튀는 소의 암내를
    어쩌지 못해
    고삐 놓친 두 손바닥에는 마른 쇠똥 자국만
    남아 있었다

    채소밭에 뿌린 분 냄새가
    지독히 올라오는 이른 밤
    외양간 암소의 똥구멍에서 연신 진이 나오고
    후드득, 아비의 불호령

    비 올려는데, 소여물 빨리 주지 않고 뭐해

    소 풀 뜯기기가 지겨워진 아이는
    막 나기 시작한 겨드랑이 털 올만
    소매 속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후드득, 머리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 윤선아의 「소나기」 전문

    이 시는 유년의 체험을 토대로 과거를 회상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화자의 나이는 십 대의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때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서 상대에게 말을 거는 대화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내적인 대화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 시는 통화체계는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통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나-나(I-I)통화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보고 추억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자기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과거를 들추어내면서 그 공간으로 돌아가고픈 과거 지향적인 자세를 내비친다. 이러한 시들은 굳이 상대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상황을 넌지시 제시해 주는데 머문다. 이 시는 시인이 겪어온 지난 시간의 성장체험을 다루고 있다. 시인은 유년의 화자로 등장하여 유년으로부터 청년기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경험한 한 순간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시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향하지 않고 지난 순간의 나와 맞닿아 있다.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시인이 제시하는 체험의 순간으로 이끌리면서 각자의 성장체험을 회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 제목 ‘소나기’는 매우 암시적이다. 그것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와도 연상되어서 읽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작품간에 상호텍스트성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 시에서도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녀와 소년 사이의 이성에 대한 눈뜸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부분이 있다. 4연의 “비 올려는데, 소여물 빨리 주지 않고 뭐해”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에도 소년은 “막 나기 시작한 겨드랑이 털 올만 / 소매 속으로 만지작거리다가”에서 엿보이고 있다. 그것은 소년이 성적으로 눈뜨게 되는 상황의 암시를 통해 다가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의 제목 ‘소나기’는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이면서 매우 적절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시에서 “후드득”이라는 부사는 떨어지는 “아비의 불호령”과 “빗방울”에 동시에 연결되어 읽히면서 이 시를 더 흥미롭게 하고 있다.

    구두굽이 빠지도록 바쁘던 오후, 잠시
    달걀후라이 두 개를 부쳐 놓고
    맛소금이 없어
    굵은 왕소금을 빻았다

    열기가 오른 후라이팬에는
    배고픔이 소금처럼 튀어 오르고
    노른자 위로 풍기는 기름내처럼
    내 마음의 서러움 방안을 메웠다

    마땅한 반찬이랄 것도 없는 밥상을
    정성스레 들고 단정한 방에 놓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던 오후, 잠시

    달걀후라이 두 개가 마음처럼 굳어질 때까지
    저녁 무렵, 붉은 태양이 초췌하게 지는
    아무런 말도 내게 건네지 않는
    태양을 나와 함께 야속하게 바라보았다
                 - 홍미경의 「오후 그리고 태양」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고 있다. 굳이 화자와 청자를 분명히 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고, 일기를 쓰듯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사유하는 내용을 뇌이고 있다. 이 시 또한 나-나 통화체계로 드러난다. 시적 화자는 스스로 경험한 삶의 한 순간을 형상화하였다. 따라서 화자가 자신의 내면으로 목소리를 나직이 전달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20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자취 생활을 하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삶이 주는 고독감을 형상화한다. 1연 “구두굽이 빠지도록 바쁘던 오후, 잠시 / 달걀후라이 두 개를 부쳐 놓고 / 맛소금이 없어 / 굵은 왕소금을 빻았다”라는 상황은 근근히 차려진 밥상을 의미한다. 구두굽이 빠지도록 바쁜 일상과 거기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밥상, 그것은 맛소금 대신 왕소금을 빻아놓은 상황으로도 압축된다. 시적 화자는 배고픔을 메우기 위해서 밥상을 차리고 ‘달걀후라이’도 두 개를 부쳐놓았다. 그리고 홀로 그 밥상 앞에서 수저를 들다가 너무나도 사람이 그리워, 함께 하는 훈훈한 삶이 그리워서 눈물을 떨구는 생의 절절한 순간을 보여주었다. 이 시의 3연 3행과 4행 “하나님 감사합니다 / 눈물이 왈칵 쏟아지던 오후, 잠시”에서 화자의 감정은 절정에 달한다. 초라한 밥상을 차려놓고 그것을 먹으려 할 때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묻게 되는 순간의 애절함을 우리는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시에서 화자에게 다가오는 일상의 적막감이나 삶의 어려움은 그 원인이 분명치 않다. 그것은 사회적 삶으로부터 야기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존재론적인 고민 쪽에 더 가까운 듯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막연한 것이기도 하다. 화자는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그만큼 홀로 삶을 감당해 갈 수밖에 없는 외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다가서기 위해 노력한다. 이 시는 결국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를 부축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깨닫는 절실한 자기애의 한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의 장점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구체적인 상황의 제시를 통해 독자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 아침 가방을 어깨에 메고
    힘차게 골목길 나서다
    지긋한 할아버지가
    손수레 끄는 것을 보았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서도
    할아버지의 손수레 밀어 드렸다

    수레는 한결 빠르게 언덕을 올랐다
    우리의 수레에 싣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이것저것 더 많이
    담아보았다

    그래도 손수레는 거침없이
    비탈길을 올랐다
                   - 김기연의 「손수레」 전문

    이 시를 쓴 학생은 자신이 경험한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시로 표현하였다. 시적 화자는 가방을 들고 골목에 나서다 할아버지가 끌고 가는 손수레를 발견한다. 할아버지의 수레를 밀고 함께 언덕을 오르면서 서로 따뜻하게 돕고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화자는 손수레 끄는 할아버지를 밀어드리면서 서로가 서로를 밀어준다면 우리는 얼마나 아름답고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펼치고 있다. 매우 단순하기도 하지만 진실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쉬운 시가 좋은 시다’라 할 때 이 시는 그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위의 시는 나-나 통화체계를 띠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적 화자는 개인적인 정서를 벗어난 사회적 삶에 대한 인식을 보이고 있다. 이점이 이 시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이 시에서는 1연에서의 ‘나’가 2연에 이르면 ‘우리’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우선 ‘나’와 ‘할아버지’를 아우르는 것이지만, 사회 전체로서의 ‘우리’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삶을 사회적인 관계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 이 시의 세계를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갖고 있는 따뜻함과 삶에 대한 건강한 의식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 시를 나-나 통화체계로 파악할 수 있지만, 청자로서의 ‘나’는 ‘우리’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만큼 시적 화자의 사회인식 태도는 곧 그의 시에 반영되는 것이다.


    눈이 부셔요

    온종일 머리 위에 햇볕을 이고 사는
    내 영혼에 커튼은 없습니다

    나는 회전할 수 없는 삶을 비틀어
    고된 몸 뉘일 곳 찾는 붉은 눈동자
    나그네처럼 이곳 저곳 기웃거려 보았지만

    애기 숨결 연하게 톡 터지는 도라지꽃 아래
    푸른 손바닥 드리워 그늘 된
    느티나무 한 그루밖에는 보질 못했어요

    눈이 부셔 눈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아름다운 가시면류관
    햇빛 받으며 뜨겁게 타 들어가던 날
    거룩한 아버지 마지막 햇빛마저 산산이 쪼개어
    아들 몸 붉은 눈물 방울로 씻어주었다는데

    왜일까요

    내 영혼에는 그 무엇 드리울 것 없이
    산 중턱 그리운 뻐꾸기 소리 밀려난
    짐승의 이빨 무서워라, 번뜩이는 흙먼지 일어나는 소리
    어디선가 쓰러지는 고층빌딩 사이 찢어진 햇볕이고

    더 아래로
    시린 살갗 터 기어가는 뱀 몸뚱아리 같은

    아, 내 영혼에 커튼은 어디 있을까요
                   - 오진원의 「영혼의 창문」 전문

    이 시는 나-남 통화체계를 취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시를 쓴 학생의 종교적 삶을 읽을 수 있다. “거룩한 아버지 마지막 햇빛마저 산산이 쪼개어 / 아들 몸 붉은 눈물 방울로 씻어주었다는데”에서 종교적인 포오즈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상대에게 전달하는 청자로서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나’는 화자로서 청자인 ‘하나님’에게 인간적인 고뇌를 피력하고 있다. 이 시에서의 화자는 청자에게 경어체를 쓰고 있다. 이 시의 어조는 어린아이 입장에서 부모님에게 간청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시적 화자는 청유형의 목소리를 통해 상대에게 간청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그가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을지라도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이 시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갈등을 노래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인간으로서의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존재론적 인식을 통해 “아, 내 영혼에 커튼은 어디 있을까요”라고 표현하였다. 시의 언어와 기도의 언어는 서로 통한다. 그것은 진실한 자기 사유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주 간절한 기도는 그대로 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 쓰기의 한 비밀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의 청자는 ‘하나님’이다. 종교적 성숙을 향해 가면서 겪는 자아갈등과 고통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이 시에는 곡진(曲盡)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우리에게 더욱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3

    요즈음의 시들은 주로 자신의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정서나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시대가 거대담론이 사라진 상황에서 미시담론으로 빠져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개인의 내면에 일고 있는 정감의 내밀함이나 섬세함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대 역사․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형상화에는 소홀한 감이 많다. 그만큼 시에서 메시지를 강조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물론 시에서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강요할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인들이 개인의 사생활이나 감정과 정서만을 노래하고 그 시대 사회 상황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보다 보편적인 주제를 통해서 민족이나 인류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약화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다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재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런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전문

    위 시는 신동엽의 시적 특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우선 이 시는 강한 어조가 율격과 맞물려 즉각적으로 침투력을 형성할 만큼 직정적이다. 또한 이 시에는 ‘껍데기’와 ‘알맹이’, ‘아사달’과 ‘아사녀’, ‘중립의 초례청’, ‘흙가슴’과 ‘쇠붙이’ 등 그의 시 전반의 핵심어가 종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시는 어조와 핵심어가 일체화되어 완벽한 구조를 이룬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강하게 시의 문맥 위로 깔리면서 강력한 전달을 꾀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어느 개인이나 몇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누구에게라도 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지에서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나-남 통화체계로 이해된다. 이 시는 특히 ‘껍데기’의 상징에 의해서 시대를 초월하여 리얼리즘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는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초한 상징으로서, ‘껍데기’의 상징성은 시대를 초월해서도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만큼 이 시의 메시지는 강력하면서도 시적으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청자는 어느 특정한 대상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세상 삶 가운데서 비본질적인 것, 가식적으로 꾸미고 치장하는 것, 순수한 알맹이의 삶을 왜곡시키는 것이면 모두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어느 일정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여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람뿐이 아니라 제도나 이념 등 모든 모순들도 함께 지향하고 있다. 그만큼 이 시의 의식은 특정한 사실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신동엽의 시에 나타난 서정성은 단순한 서정이나 순간적인 서정이 아니다. 그의 시에서는 개인적인 체험일지라도 그것이 보다 구체적인 민족의 역사적 사실로 객관화되어 나타난다. 또한 그는 시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의 시는 담화 형식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강하고도 직접적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직접적으로 “시란 바로 생명의 발언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동엽의 시에서는 강한 담화지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시에서 담화 구조를 통하여 독자와의 공감 영역을 극대화하고자 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에는 대개의 경우 화자가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시는 화자의 개인적 체험의 특수성보다는 민족 전체의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는데, 이는 민중시의 한 특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시는 거의 나-남 통화체계를 취하고 있다. 그의 시는 개인과 개인간의 의사소통이 아니라 민중 전체를 지향한다. 그는 시적 담화 속에서 민중이라는 집단을 그 실체로 하여 개인적 화자는 문맥 속으로 숨겨 나타낸다. 이점에서 그의 시가 강한 민중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신동엽의 시는 나-남 통화체계 가운데서도 청자의 다양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의 청자는 ‘너→당신→사람들→조국→인류’로 확대되어 가는 담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의 경우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는 경험도 항시 역사․사회 현실과의 연관을 가지며, 나아가서는 인류사의 차원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그의 시적 담화는 ‘나→우리→민족→인류’로 확대되어 가는 동심원적 구조로 파악된다. 이점은 그가 ‘시는 우주적 발언’이며 ‘시인은 인류 발언의 선창자(先唱者)’라고 주장했던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로 이점이 신동엽이 인식한 시의 사회적 기능이며 시인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울러 우리들에게 이 시대의 시 쓰기라는 문제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한다. 점점 시의 위치가 약화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지고 있으며, 실제로 시가 많이 쓰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모두가 시의 독자보다는 시 창작의 주체로 서려는 것이 아닐까.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또 한편으로 시가 점차 하향식 평준화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도 판단된다. 그리하여 깊은 감동을 주는 시들이 적은 것이다. 강한 감동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시가 나올 때 시의 가치는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는 본래 다소 어려운 것이다. 시란 고급예술로서 전 국민이 시에 관심을 갖고 시를 생활화하는 상황으로 가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독자들의 반응이나 독서시장의 동향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삶과 시, 이 사이에는 현실 논리가 버티고 있다. 그러나 시를 쓰고자 하는 학생들은 생이란 좀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정신의 깊이를 향한 자기 몰입과 치열한 시정신을 통한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을 통해서 우리 삶은 얼마든지 풍요로워 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진실을 꿰뚫어 내려는 노력과 마음의 풍요를 진정으로 누리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본주의 앞에 굴복해 버린 정신,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중의 자세가 희박해져 가는 시대에 그것들을 단호하게 부정하면서 일어서려는 것이 시정신이다. 그러한 의지를 갖는 사람만이 시를 쓸 수 있다. 시정신, 그것을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삶은 새로워지며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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