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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응시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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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098회   작성일Date 07-02-12 12:25

    본문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응시의 미학  


    김화순,『사랑은 바닥을 쳤다』
    윤성택,『리트머스』
    박현수,『위험한 독서』

    박송이

    1

    현대인들에게 '나'와 '너'의 경계가 분명해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자기 소외 의식을 경험하고 있으며 항시 삭막한 '시간의 굴레' 속에 얽매여 살고 있다. 이것은 자기 내면과의 소통 부재와 상통한다. 인간은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규율과 법을 지키며 그 흐름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계속적으로 기계화된 현대 사회의 추세를 따라가면 삭막감과 소외감이 깊어질 수밖에 없고, 그들은 심각한 '병적 징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고픈 욕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생텍쥐페리의『어린왕자』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이 말은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무수히 많은 장미꽃들 속에 자신이 길들인 단 한 송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자연이나 인생에는 우리가 해명할 수 없는 무수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오늘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아쉬운 시대이다. 우리는 편리를 누리는 동시에 차츰 소외되는 자기 내면의 가치 혼란과 현실세계와 갈등을 견디며 살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인간들의 '관계'의 끈은 무관심에서 퇴색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통 부재의 시대일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애정을 가질 필요가 있다. "친구를 가지고 싶거든 날 길들여!"라는 여우의 목소리는 나와 너의 관계의 연결고리를 갖어야 함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영원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보살핌은 서로 간의 긴밀한 관계와 애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바로 눈앞에 드러나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거나 단편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깊은 세계까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시단은 "사색과 명상과 환상과 침잠의 자세로 삶을 응시하는 관조의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다"라고 했다. 이는 우리 시대 대다수 시인들이 주요 과제로 내면세계의 응시와 사회비판 의식이 연계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응시와 사회비판 의식의 '관계'를 돈독히 맺어야 한다. 이로써 흔해빠진 존재에 불과한 것들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로 이끌어 올린다. 그리하여 시인은 온갖 삼라만상에 깊은 애정을 품고 살아야 하는 천형을 지닌 존재들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2

    시는 시인들이 체험한 산물들로 이루어진다. 라캉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 언어 하나하나를 추적해 나가보면 그 밑바탕에는 시인의 '경험적 산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시는 시인이 무의식적으로 오랜 세월 가슴에 품고 갈고 닦은 사유들이 어느 순간 시적 언어로 분출된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예리한 직관과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시적 언어에 천착해 들어가 보면 시인이 세상 만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내면에 진지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고, 세계와 자신을 관통하려는 시어의 분주한 움직임과 그 역동 속에서 그들 서로 간의 관계의 순환 고리를 찾으려는 노력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는 동안 독자와 시인은 사유 속에 드러난 본질적인 물음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게 된다.  
    김화순의『사랑은 바닥을 쳤다』에는 시인이 자기 내면을 응시하면서 느끼는 자기 고립감과 단절감 혹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겪는 갈등의 면면을 차분한 어조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결국 자기 내면의 상처는 현실세계의 아픔이고, '내'가 '피 튀기는 死의 현장'(「삶은 붉다」) 속으로 뛰어 들어 '나'의 운명(자기애)을 극복했을 때, 나와 세계와의 관계성이 회복되어가는 과정을 여성적인 섬세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근대 서구 16세기에서 19세기에 대규모의 구조적 변동을 겪으면서 '주체'의식에 대혼란을 겪은 이후, 현대 사회의 주체는 불분명하고 소외된 또 하나의 불모화된 현실을 대변한다. 현대인들은 '나'와 '너'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차라리 병들고 소외된 자기 자신에게 연민의 눈길을 돌린다. 시인은 먼저 자기 내면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자연과 인간을 어루만지면서 차츰 그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나무의 환부 가만히 만져봅니다 손끝으로 짜르르 전해오는 울퉁불퉁 고통을 우려낸     언어 병 깊어 나무의 형상 추할수록 붉은 말씀들 암세포의 절정입니다 그것이 아름다    운 것은 한겨울을 쟁쟁쟁 울며 法施처럼 간병하던 동박새 때문입니다 이곳에 와서 참    으로 오랜만에 마음의 뼈를 울리는 서정시 한펴 아프게 읽고 갑니다
                                                   -「붉은 말씀들」부분 -

    한겨울에도 고통을 견디며 붉은 꽃을 터뜨리는 동백, 시인은 언어와사투를 해 온 오랜 인고의 시간동안 내면에 비정상적으로 증식하고 있는 자신의 상처를 토해낸다. 시인의 내면 "안에 묶여 사는 짐승 나도 모르게 그렇게 울음 토해낸 것일 게다"(「환상방황」). 추위 속에서 꿋꿋하게 버텨내고 상처의 결정체를 뿜어내는 동백나무의 투사적 이미지는 처절해서 더 아름답다. 시인은 자신과 동백나무와의 관계성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 주체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암세포와 같은 혹 덩어리들이 '붉은 말씀들'로 아름답게 꽃피어낼 수 있었던 것은 한겨울에도 동백나무 곁을 떠나지 않고 "法施처럼 간병하던 동박새"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아픈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자기 내면에 자리한 동정과 위로로 그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 결국 동백나무와 동박새의 관계성은 그 둘 시인과 시인 내면의 상호의 역할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나'와 '너', '나'와 '세계'와의 역할의 절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서로를 위로하고 길들이는 관계는 상대를 옥죄이고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것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의 '나'는 사라지고 '너'로 가두어진다는 본질의 변질성을 내포한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파편의 풍경은 뚝뚝 피 흘리고 있다 … 몸이 기억하는 그의 손길 포기하지 못한다"(「시간은 나를 사육한다」). 시간에게 사육된 시인은 시간을 움직이게 하는 주체자가 아니라, 성벽처럼 견고한 시간 속에 끌려다니는 중독환자로 대체된다. 그러기에 '시간'과 '시인'은 일방적인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기형 같은 무의식을 포류하고 '오락가락 자맥질하'면서 "생활의 경계 무너뜨리고자"(「치매」) 한다.
    때때로 인간관계는 "빈틈없는 생활에 구멍 숭숭 내는 일"(「시인의 밭에 가서」)이고, "다섯 번의 몽상 끝나면 나를 토해 새하얀 고치집을 짓는"(「시간 속에 웅크려 날개를 짜다」) 일이다. '구멍'과 '고치집'은 안락의 공간이면서 교류의 장소로 기능한다. 몽상의 시간 속을 벗어나 밖으로 뻗어 날아오르려는 시인의 의식이 '변신을 꿈꾸는 나'로 변화되고 있다. 시인은 몽상의 공간으로 '꿈의 동굴'을 탈출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환상의 장' 속 즉, 자기 내면의 천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욕망하고픈 진정한 응시의 장소는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세계 속이다.

    '나'를 찾아 헤맨 나날들, 수없는 '나'를 반복적으로 빙빙 돌리다보면 회교사원뜰의    둥근 경전처럼 손 발 사라진 명징한 '나' 만날 수 있을까 바람 거세게 불고 잘린 곳    의 상처 환상통처럼 스며드는 하루 내 안의 비인간적인 것, 얼굴이 있는 토르소가 된    다.
                                                   -「로타리 토르소」부분 -

    우리의 하루에는 권태와 일상의 얼레가 칭칭 감겨져 있다. 쳇바퀴와 같은 지루한 일상 속에서 시인이 대상을 보고 다시금 되 바라본 것은 바로 내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내 안의 비인간적인 것" 그것은 일상 모습들에 대한 명징한 얼굴이다. 시인은 '나'를 벗어나 일상을 응시하면서 자기 내면 밖의 상처들에게 눈을 돌린다. 시인이 바라본 세상 밖 거리는 온통 'bAng의 천국이다.' 자신을 방 안에 가두고 사는 현대인들은 타인의 불편한 시선을 피해 은밀하고 폐쇄의 공간으로 'room'이나 'bang'에 가고 싶어 한다. 세상에 방이 늘어갈수록 체온을 잃어가고 집 안의 방들, 지금 우리 사회는 가정과 사회 어느 곳이든 '나' 아닌 것을 '타자'화 시켜 소외의 굴속으로 자신의 몸을 길들인다. 이렇듯 소외의 길, 즉 하나의 섬으로 길들여지는 현상에 무감각해지면 우리는 서로 간에 단절의 벽을 쌓게 되는 비극적 현실에서 빠져나오기 힘들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bAng의 제국"이지만, 이러한 형국일수록 나만의 세계가 아닌 우리의 세계를 위해 고립의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또한 시인은 자신이 길들여 놓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애의 환상이라는 불투명한 욕망덩어리로부터 탈출하기를 절실히 소망한다. 어둠 속에서 자신과 관계했던 응시의 일상들을 버리고 그 자리에 다시 차곡차곡 세계와의 응시의 일상들을 채워 넣고자 한다. 시인은 화성공장에서 일했던 태국 처녀 사나피, 기러기아빠인 김씨, 방글라데시 열두 살 소녀 샨타, 쇼핑하는 여자, 주상복합빌딩의 화려한 불빛 등 이 다양한 삶의 모양들을 조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시인과 세계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속한다. 시인은 우주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들을 보듬는 존재이다. 김화순이 그려낸 언어들 속에는 시간의 굴레를 비켜 사는 '소중한 존재'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3

    윤성택은 현대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 정신의 참상을 침착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형식실험을 벗어나 세계와 자의식의 관계를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형상화한다. 시인은 ‘어둠’과 ‘빛’을 통해 어둠의 억압적 성질과 빛의 저항적 속성을 중심기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썰물과 밀물처럼 몰아내고 밀려들게 하는 원초적인 힘으로 풍부한 기표들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한다. 시인의 내면에 천착한 언어와 대상들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이 현실세계를 이끌고 가는 원동력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시인은 현실의 물리법칙을 위배할 수 없는 프로그램화로 구성되어져 있기 때문에 “있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 실시간의 배열”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자의식은 현실세계의 ‘숙명적’인 구조의 영역을 인식하면서 지속적인 불안감을 갖는다. 그리하여 존재의 억압을 계속적으로 역행하여 자기의식에 직면한 한계를 초월하고자 한다. “길이와 폭으로/ 테두리를 두르던” (「대학병원 지하주차장」) ‘지하 주차선’으로부터 벗어나, 어둠의 침묵을 깨고 “지상으로 올라”가고자 한다. 그러나 생각이 멈춰 있는 그 속은 “달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세상이다. 끝까지 꿋꿋함을 지니려는 시인의 결연의 태도는 편견의 기억을 따라 “잠들기 전 도시와 거리, 사라진 저녁들”의 형체를 찾아 나서지만, 의식적 존재로서의 ‘나’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시인은 일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달의 ‘환영’처럼 세상에 머물면서 애초부터 구조의 필연적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시인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서로 간의 소통의 거울인 ‘커뮤니티’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전의 ‘소통’의 개념은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의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현대인의 공동체 의식은 물질문명화 속에 개인화의 의식이 뿌리 깊게 녹아져 있다.  

    로그인을 했다가 로그아웃하면/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서도 나는 없다
    내가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경계에 접속된 순간뿐이다
    어디에도 있는 나를/ 어디에도 없게 하는 로그아웃,
    나는 태연하게 다른 곳으로 로그인된다
                                                   -「로그인」부분 -

    현대인들은 정보의 바다 속, 즉 PC(개인용 컴퓨터)통신 화면 속에서 주체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 용이해졌다. 해가 더 해갈수록 사람들은 접속 기능 수단을 통해 다발적이고 쌍방향적 대화를 나누고, 뜻만 있으면 어느 공간에서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해 졌다. 접속 환경 속에서 누구나 그 공간을 가입하고 탈퇴할 수 있는데, 우리는 테이터화 된 전산기기 속에서 연합의 자율 구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통신수단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풀어 놓고 ‘우리’라는 공동체 공간속으로 불러들인 거 같다. 그러나 시인의 말대로 이렇게 ‘로그인’(접속)했던 문명 수단의 소통 공간에서 ‘로그아웃’(폐쇄)해 빠져나와 현실세계로 돌아와 보면, ‘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면 실제 현실 속에 흩어져 있던 의식들이 제 기능을 하는데 무리가 따른다. 실재하지 않는 공간을 기억하는 의식과 현실의 의식을 구분짓지 못하면 ‘로그아웃’ 후에도 ‘나’와 ‘너’와의 괴리감은 심각해진다. 네트워크 커뮤니티는 일방적으로 대상을 임의적으로 인정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용할 뿐, 실제는 “복잡한 무늬의 테이터”(「창고 속 우주」) 속에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자아의 행로는 현실세계를 도피하려는 의식과도 연관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로그인’하여 자신의 동일화를 찾기 위해 연결 관계의 선을 놓지 않는다. 인간 욕망 가운데 끝없이 자기 동일화의 추구와 내면의 상처를 계속적으로 은폐하면서 회복하려는 이중 본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 전반적으로 정보망 속은 물론이고 현실세계 관계들이 멀어지고 있다는 ‘간극’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대상들 간의 소외를 “입 벌린 어둠 속”(「스테이플러」)에서 보고, ‘나’와 ‘너’ 사이의 거리감을 인지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균열의 조짐에 초점하여 그 틈의 중심으로 비집고 들어가 “빽빽하게 들어찬 어둠을 솎아내”(「대학병원 지하주차장」)고자 한다. 시인이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운명적 관계들은 ‘경험의 구체성’을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삶의 공간에 불가피하게 기생하는 ‘경계’의 속사정을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로 시인의 삶에 포착된 관계 사이의 '균열의 발견'이 그것이다. 사실 자신과 타자를 완벽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존재들의 모습을 자기 타자화로 축소하여 그 속에 거주하면 상처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이”(「탈수 오 분간」)고, “축대는 무너져 내릴 순간까지/ 금과 금을 이어”(「접속」)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 단단하고 견고한 ‘간격’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힘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 중략 … 어두운 방 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산동네의 밤」부분 -

    산소절단기 끝에 불꽃이 튀고 있다/ 그는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본다/
    먼지와 섞여 소용돌이치는 불빛.
                                                   -「한밤의 제우스」부분 -

    시인은 기존의 규격의 틀을 벗어나 세계와의 관계 속에 규정되는 ‘어둠’의 존재들에게 관심의 눈길을 보낸다. 시인은 어둠이라는 공간 속에서 살아있는 “소용돌이치는 불빛”의 존재를 감지한다. 시인에게 어둠과 불빛은 별개가 아닌 채 하나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어둠 속에 내재된 불빛같은 생의 끈질긴 욕망을 이끌어 내어 어둡고 소외된 어둠의 근성을 타오르게 한다. 이 어둠은 '너'와 '나'의 소외된 내면의 상처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을 허물어트릴 수 있다는 관계의 회복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옥상 균열’(「장안상가」)의 ‘금의 끝점’으로 “담쟁이는/ 건물 균열을 타고 자꾸만 뻗어올라”가고, “폐쇄된 벽과 벽을 스멀스멀 더듬”어 오르는 담배연기의 ‘허연 공포’ 역시 “사람/ 사이를 귀신처럼 배회하고 있다”(「담배연기」). 이러한 시인의 시적인 형상화는 ‘나’와 ‘너’의 “경계의 타성”을 벗어나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의 만남을 기대하기에 가능하다. ‘어둠’과 ‘불빛’의 지속적인 탈중심화를 통해 어둠을 지켜내면서, 그 안에 있는 불빛의 힘을 드러내고자 한다. 어둠을 더듬더듬 찾다보면 ‘뜨거운 것이 온다’(「접속」)고 하지 않았던가.
    시인의 말대로 우리는 재단되어진 ‘세로축’과 ‘가로축’이라는 ‘루빅스 큐브’의 공간에 살면서 ‘정육면체 색조각’의 한 면만을 맞추고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과 구조의 기반을 ‘기적적으로’ 부숴 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 자리한 단절의 벽을 깨뜨려야 한다. “이  生을 분해해 조립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잠시 잇댔다가 어긋나는 여정”을 걸을 수밖에 없다. 자의식의 소외와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가 “불씨 하나씩 달고 있”(「산동네의 밤」)어야 한다. 그리하여 벽에 금 간 그 틈 속으로 애정 어린 관심을 스미게 하고, 서로의 간격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공사장 보도블록 사이”(「홀씨의 나날」)에 날아온 연약한 ‘홀씨 하나’까지 우리가 그 곤경한 지점으로 스며들어 간다는 것은 대상과의 단절을 뛰어 넘어 자신과 타자의 구분이 아니라 차츰 서로에게 ‘물들’(「리트머스」)어가고, ‘젖’어 들어감이다. ‘너’와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사각 공간지대의 ‘공중전화부스’ 안도 “네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아야”(한강에서 고래를 보다」)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사각 틀 속에서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신호음 저편’에 관심을 가졌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너'에게 젖어들어 간다. 신호음이 젖어든 아득히 먼 곳 어디든 관계없이 시인의 관심어린 애정이 살아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저 편 어딘가의 그리운 것들이 금세라도 선명하게 달려와 대답해 올 것이다.
    시인 내면에 “나는 썩지 않을 것이다”(「버려진 인형」), “CCTV안, 나는 아직 살아 있다”(「술잔의 지문」), “나는 끝까지 결연하다”(「시간의 이면1」)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단절과 고립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꿋꿋이 잃지 않으려고 결연하는 한 세상 어둠도 이 시인 앞에서는 한 점 빛이 되지 않겠는가. 내면세계와 현실세계의 ‘그리움’의 간격을 온 몸으로 물들이고 있는 완곡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공중전화부스에서, 나는 아직 여기 있다고”


    4

    시와 세계에는 우주론과 존재론이 일맥상통하는 본질적 물음이 담겨져 있다. 박현수는 시에 대한 명상을 통해 시가 세계에 대한 명상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自序), 그의 시가 진정으로 올바른 ‘길’로 행하는 '언어의 고행'의 길을 걷는다. 자신과 언어와 세계와의 처절하고 외로운 싸움을 극복하기 위해 시인은 사유의 의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이처럼 시인의 시집에는 투명한 언어와 원시적 세계의 갈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는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를 반영하고, 시는 또한 세계를 드러낸다.
    시인이 시와 세계를 풍요롭게 확장하기 위해서는 모진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야만 한다. 생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인은 생살을 찢어내는 고통의 수행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그러한 과정으로 완성된 시와 세계는 ‘수면’과 같이 ‘수평선’으로 잔잔히 흘러가는 것이다. 시인은 ‘수평선’처럼 닮기 위해 자신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수심을 딛고/ 떠오를 수밖에 없다”(「물수제비」)고 말한다. 물은 닫힘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에게 쉽게 흡수되는 성질을 지닌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상하 구조적 체계를 벗어나 우주 본질적 성질로의 수평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 시인이 내면 의식의 깊고 어두운 수심 바닥으로 침몰한 뒤, 그 바닥을 딛고서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비로소 시 한 줄이 완성된다.
    우리는 때때로 시어들이 낭비되고 감정들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자기감상에 빠진 시를 접할 수 있다. 박현수는 자의식에 닫혀 세계로의 확장이 막혀있는 시들에 질타를 가하면서 언어의 원시성을 고집한다. 이를 위해서 시인은 대상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 대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세상 만물이 시인의 언어로 살아 숨 쉴 수 있게 되는 것은 그것들을 단순히 생각하지 않고, 대상들에게 경외의 마음을 갖는 시인의 엄숙함 때문이다. 박현수의 시집은 시를 쓰는 내내 관계 했던 대상들에 대한 찬양이며, 내면의 상상력의 한계에 대한 도전으로 보인다. 또한 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시와 세계와의 관계를 진중하게 반성하게 한다. 시를 깊이 있게 사유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읽었던 부끄러운 경험들을 벗어던져버려야 한다.

    거대한 바위로
    상상력을 포석하던 시대를 경배하라
    … 중략 …
    거대한 주제일수록
    수사학은 가난해지고
    오래 다듬을수록 구도는 단순해진다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촉은
    기도처럼 돌아왔으나
    하늘로 오르는 향연의 길은 열렸다
    묵직한 단어
    몇 개로 건축한
    최최의 시가 봉헌되었다
                                                   -「고인돌」부분 -

    시인은 ‘상상력’의 시대인 고대의 수사학에 회귀하여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한다. 시인의 고민은 이런 것들이리라. 시인이 바라보는 현실세계는 폐쇄되고 고립된 인간의 마을이다. 자연과 인간이 이웃이 되지 못하는 현실에는 ‘욕망’을 충족하려는 지식체계들이 건축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하늘에 “향연의 길”을 열고 그 곳으로 숭고한 '최초의 시'를 '봉헌'하고자 한다. 이것은 “심연 속을 유동하는, 피할 수 없는” 시인 내면의 자리한 거부할 수 없는 詩作의 욕망이다. 거대하고 광활한 원시문명 속은 자연과 세계, 혹은 나와 세계라는 본질에 이르는 사유들을 가능하게 해 준다. 고대인들은 ‘거대한 바위’를 통해 상상력을 확대해왔다. '나'를 초월하여 세계의 만물을 경배하면서 자연 속에서 스스로 소통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의식구조를 단순하게 만드는 허구의 산물들 속에는 감각적으로 포장된 의도된 담론들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 문명에 길들여진 우리의 삶에는 고대의 원시적 상상력을 사유하려는 의지를 엿 보기 힘들다.
    시인은 자연 현상에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동안, 자기 내면에 치부처럼 앉아 있었던 언어의 무게를 탈피하고자 한다. 묘연한 ‘우항리 공룡발자국’(「우항리 공룡발자국」)의 묵직한 흔적 속에 읽어낼 수 없는 수사학, 한여름 “단단한 언어를 퍼부어대는”(「우박」) 우박의 투명한 생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죽어버린 '옛 줄기는 버'(「타작」)리고 ‘새로운 문장들’을 늘어 놓기를 열망한다. 세계로 눈을 치켜 뜬 시인에게 이제는 온갖 삼라만상이 어휘집이다. 온갖 자연 현상이 시를 설파하고 있는 듯하다. 시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자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인은 현실속의 규격화되고 굳어버린 언어들, 허구가 실재화 된 현실의 운명을 극복하여 벗어나고자 한다. 이제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움직임에 생생한 언어를 덧그려준다. 예전의 상징화된 기표들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시인이 소통했던 기표들을 서서히 써낸다. 그러나 시인이 써낸 그것들은 읽혀질 수 없는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잡지들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채석강」)는 "채석강 앞에" 서서 "읽혀지지 않는 경판들"을 보고 있는 시인의 심정은 어떠할까. 시인은 켜켜이 쌓여 있는 자연의 오래된 형상 속으로 섣불리 다가서지 않는다. 수 천 년 역사 속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 내려온 세계의 불변의 진리를 시인은 겸허한 자세로 감탄할 뿐이다. 시인에게 모든 만물 하나하나가 진리요, 명상할 수 있는 귀한 법전 이다.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시작법을 위한 기도」부분 -


    시작을 위한 시인의 각오는 절절해 보인다. 시는 의도대로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과 사유의 원동력으로 씌어지는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흔적들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회고'나 '과거'의 집착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생을 허비'하기 때문에 이전의 관념에 머물던 '나'를 더듬던 기억들은 멈춰야 한다. 즉 시가 시로 살아나게 하는 시를 써야 한다. 시인의 이러한 간절한 기도는 우리 '미래의 시인'들에게 경고하는 하나의 각성제로 촉발되어 의식들이 자극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우리 "삶이란/ 상투어가 진리로 현현하는 어원론적 시간"(「클리쉐」)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 낡은 생을 언어와 세계와의 '문자'적 교류를 통해 세상을 낯설게 만든다. 이 낯설음은 형상문자의 무언의 확장 기호이면서, 아득한 심해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시인이 먼저 관념어와 상투어, 그리고 인용문 각주 등 언어의 소심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의지가 끝난 곳에 상상력도 길을 잃"(「상상의 길」)기 때문이다.
    시와 사람이 오래토록 썩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닮아야 한다. 시인이 생각하는 시는 '영혼'이고, '몸 너머에 존재'(「시총」)하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절정의 삶(「출정」)으로 '푸른 전언'(「강아지풀」)을 '영혼의 지문'(「솔방울」)으로 믿는 것이다. '미래의 시인'들이 인고의 '뼈의 문장들'로 하여금 '나'와 '세계'에 한 점 꽃무늬를 수놓아야 하지 않는가. 박현수의 순례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어스름 속에서 투명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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