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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성환, 손종호, 김만수 시집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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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860회   작성일Date 07-07-03 17:15

    본문

    바짝 ‘마른’ 사람, 구도자, 체부의 시들
    -서평 : 위선환(<새떼를 베끼다>, 문학과지성사), 손종호(<새들의 현관>, 시와에세이), 김만수(<산내통신>, 고요아침)

    아주 오래 전에 제기된 문학의 위기에 대해 여전히 논의 중이었던 올해 봄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시집들이 쏟아져나왔다. 그 중에 위선환의 《새떼를 베끼다》와 손종호의 《새들의 현관》, 김만수의 《산내통신》도 끼어있다. 이 세 시집은 얼핏 ‘새’나 ‘ㅅ’ 때문에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으나 셋 모두 각각 구별되는 특유의 울림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위선환의 시집은 치밀한 관찰과 그 속의 깨달음을 ‘보고 말하기’라는 기존의 이미지즘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읊조리고 있고, 손종호의 시집은 구도자가 부르는 절실하고 뜨거운 노래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김만수의 시집은 일상, 그야말로 시인의 주변 사람들과 주변의 소소한 일상을 때로는 따뜻하고 부드럽게 포용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위트와 비틀기로 말하고 있다.  

    바짝 ‘마른’ 사람의 바라보고 말하기- 위선환,《새떼를 베끼다》

    위선환은 환갑이 다 된 나이로 시단에 등장했다. 이 사실은 그의 시를 읽는 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의 시집은 치밀한 관찰 속에 날카로운 깨달음이 버물려졌으나 그 어조가 치기어리거나 거세지 않고 진중하면서도 차분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를 읽다보면 아주 오래도록 ‘마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것들을 되새겨내어 진중하게 한 편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한 듯한 느낌을 준다. <수평선>에서 한 노인은 ‘비쩍’이 아닌 ‘바짝 마른 등짝’을 지니고 있는데, 이 때의 ‘마름’에는 동음이의어의 효과적인 중의법이 숨어있다. 뚱뚱하지 않고 ‘마른’, 물에 푹 젖어있지 않고 ‘마른’이란 의미가 동시에 가능한 것이다. 이 서로 다른 ‘마름’은 묘하게 잘 어울리는 쌍이다. 마침 다음과 같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땡볕에다 나를 내걸어 둔 적 있다. 꿰어 걸려서 진땀이 걷히면서, 가죽에 소금꽃이 피면서, 서늘해지기도 하면서 / 나는 잘 말랐다. 바스락거리다가, 흔들거리다가, 잠깐씩은 잘게 떨기도 하다가 / 낙엽 지듯, 떨어져 내렸다. / 발끝 세워서 키 돋우고 안간힘 써서 팔 뻗쳐도 손끝이 닿기에는 아직 멀 듯, 겨우 닿는 그 자리에 못박혀서 / (내 몸뚱이 대신 꿰어 걸린 허공의, 그 하염없는 무게를 못 견뎠겠지) / 쇠못이 ‘ㄱ’자로 구부러져 있다.
    -<쇠못>

    시인은 ‘ㄱ’자로 구부러진 쇠못을 보며 어떤 무거운 것이 걸렸었기에 저렇게 구부러졌나 생각하다가, 자신의 키에 겨우 닿는 곳에 걸린 못에 자신이 꿰어 걸려 말려졌다는 상상을 한다. ‘바스락거’릴 정도로 바짝 마른 몸이 ‘낙엽 지듯’ 가볍게 이내 ‘떨어져 내’린다. 땡볕에 몸을 오래도록 말리면 진땀도 걷히고 어쩌면 불필요한 것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 않거나 맹목적으로 집착했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하나 둘 말라 사라지게 되고 나는 더더욱 말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몸은 점점 더 가벼워지다가 이내 떨어진다. 그러면 이제 쇠못에 걸린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시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시인이 꿰어 걸렸던 ‘몸뚱이 대신 꿰어 걸린 허공의, 그 하염없는 무게’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空’은 《새떼를 베끼다》 전체에 유유히 흐르는 한 흐름인데, 방금 살펴본 시의 ‘(내 몸뚱이 대신 꿰어 걸린 허공의, 그 하염없는 무게를 못 견뎠겠지)’나 <목어>의 ‘거죽도 속도 없이 그저 빈 것을 구태여 나무토막이네 아니네 할 것 없다’나 ‘당장 막대에 찔리는 허공이 되는 것이다’,  <천수만>의 ‘하늘 구멍에 둥글게 달빛 찼고 / 빈 내가 웅크렸다 춥다’,  또 <목어2>의 ‘오직 적막하거나 기대고 오래 서 있을 때 또는 울컥 눈물 고여 쳐다볼 때에 허공이 저렇게 저절로 운다’ 그리고 <새의 잠은 어둡다>에서 ‘새가 잠들자 이내 허공이 되는 높이를 올려다보고 있다’, <새떼를 베끼다>의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空中이다’ 등에서 그러하다.

    새떼가 오가는 철이라고 쓴다 새떼 하나는 날아가고 새떼 하나는 날아간다고, 거기가 공중이다, 라고 쓴다 // 두 새떼가 마주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를, 이마를,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친다고 쓴다 // 맞부딪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 날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다본다고 쓴다 //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 구멍 난 새 한 마리 없고, 살점 하나, 잔뼈 한 조각, 날갯짓 한 개, 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空中이다, 라고 쓴다.
    -<새떼를 베끼다>

    시인은 지금 공중에서 새떼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리고 공중이 ‘空中’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불교에서 말하길 ‘無’는 ‘有’와 대립되는 말이지만, ‘空’은 그 차이마저 허물어버리는 있고, 없고의 의식과 구별마저 없애는 개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는 유한하지만 ‘공’은 무한하다. 시인은 지금 그 공중에서 새떼들이 날아가는 것을 본다. ‘두 새떼가 마주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온 몸이 부딪치고 이쪽 새떼와 저쪽 새떼가 서로 관통하고 관통되는 것을 본다. 아마도 실제로는 시간 차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한 쪽의 새떼들만이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실재가 아니라 시인이 ‘空中’이란 말에 원래는 담겨있었으나 오래도록 잊혀졌던 의미를 다시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시는 첫 연에 압축적으로 쓴 것을 2연~5연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풀어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그러므로’ 첫 연에 그렇게 쓴 것이라고 말한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의 몸이 비므로 새들이 모인 ‘새떼의 큰 몸도’ 비고, 그 ‘빈 몸들끼리’ 뚫렸으니 뚫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므로 ‘空中’인 것이라고.  
    그런데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 혹은 ‘공중이다’와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혹은 ‘공중이다, 라고 쓴다’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해답은 이미 이 시의 제목에 제시되어 있다. 시인은 새떼를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었지만 새떼를 베낄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새떼를 베낀 것이 차선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떼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 이를테면 그저 ‘관통한다’나 ‘공중이다’라고 단언하듯이 서술하는 것보다 ‘관통한다고 쓴다’나 ‘공중이다, 라고 쓴다’라고 읊조리는 것이 한층 더 시적 울림을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이미지즘과 다른 새로운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는 주체는 살짝 뒤로 숨기고 보이는 대상만을 아무런 사사로운 감정이 없는 듯한 어투로 종결하는 것보다,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주체를 표나게 앞에 내세우지는 않지만 감추어진 ‘나’에게는 저렇게 보인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또 하나의 다른 새로운 진실을 형성하며 어떤 울림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이 활용된 시는 <새떼를 베끼다> 외에도 <중심>, <거짓말> 등이 있다. 많은 작품에서 이 방식을 쓰지는 않았지만, 또한 이러한 방식이 자주 쓰인다면 오히려 구태의연함에 빠질 위험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시들에서는 이 방식이 그 시를 더 깊게 읽히고 깊은 울림을 자아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고 보여진다.
    위에서 언급한 시들 외에도 《새떼를 베끼다》에는 <새의 길>, <혼잣말>, <토악질>등 차분한 어조로 오래도록 삭힌 작품들이 가득하다. 이와 조금 다르게 오래 집나갔던 아내가 돌아오자마자 남편인 화자에게 몸이 많이 상했다며 바늘과 실을 들어 뼈마디와 살가죽을 잇고 쑤시며 몇 밤낮 동안 수선을 하는 <재회>와 같은 시도 있다. 이 시는 얼핏 요즘 많이 보이는 그로테스크한 시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그 느낌이 전혀 다른 것은 진지하고 진중하고 무거운 어조가 가볍고 발랄하고 상큼한 것을 소거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이 시의 단점이 아닌 미덕이다. 바짝 ‘마른’ 사람이 오래도록 삭힌 이야기를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것을 듣는 것은 듣는 쪽에서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수 있는 즐거운 일이다.

    ‘천상의 길’을 찾는 구도자 - 손종호, 《새들의 현관》

    공교롭게도 손종호와 위선환의 시집 제목에는 ‘새’가 들어간다. 그리고 각각의 시집에는 비슷하게 ‘새의 길’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이미지와 의미는 같지 않다. 위선환이 <새의 길>에서 ‘짐작했겠지만 / 공중에서 거침이 없는 새는 오직 날 뿐 따로 / 길을 내지 않는다 / 엉뚱하게도 / 인적 끊긴 들길을 오래 걸은 / 눈자위가 마른 사람이 손가락을 세워서 / 저만치 / 빈 공중의 너머에 걸려 있는 / 날갯짓도 몇 개 떨어져 있는 새의 길을 / 가리켜 보이지만’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손종호는 <새들의 현관․1>에서 ‘공중에는 길이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 ‘창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며 ‘이슬 빛나는 새벽길은 / 어디선가 / 제 홀로 맑고 / 제 홀로 깊어가고 있을 것’이라며 그 길을 찾고자 한다. 여기에 손종호 특유의 구도적 자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시인은 ‘견고한 뿌리’처럼 ‘새벽길’은 존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 ‘깊어가고 있을’ ‘새벽길’, 어쩌면 ‘새의 길’을 찾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길은 ‘천상의 길’이다. 짐작했겠지만, 이 구도의 길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 그래서 집을 짓는 것도 공중에서부터 시작한다.

    구름의 태 속에 들어가 / 구름이 된 자는 알지 / 공기 속에는 물의 혼이 살고 / 그 물들 모여 구름을 이루듯 // 우리의 살 속에 무지개가 살고 / 그 무지개들 모여 / 천상의 길을 이루고 있음을. // 그 길 따라 새벽별 빛나면 / 한 이슬이 또 한 잎새를 깨우고 / 내려와 또 한 풀잎을 깨우고 // 그 길 따라 겨울이 오면 / 작고 하얀 침묵들은 모여 / 더 큰 순결한 침묵 / 흰 빛은 더욱 큰 흰 빛으로 / 누리를 묶고 빈 가슴들을 묶어 // 새벽 문 밀치고 들판에 서면 / 아아 한 가지 母音으로 출렁이는 / 어머니의 바다 / 한 손길로 일체를 덮는 / 태초의 / 그 무궁한 온유
    -<공중에서부터 집짓기․1>

    시인은 흡사 ‘구름의 태 속에 들어가 / 구름이 된 자’와 같이 ‘우리의 살 속에 무지개가 살고 / 그 무지개들 모여 / 천상의 길을 이루고 있음’을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한 손길로 일체를 덮는 / 태초의 / 그 무궁한 온유’를 간직한 ‘어머니의 바다’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어머니의 바다’가 마지막 종착지인 듯이 보이지만 종착지인 동시에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태초’이지 않은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여러 신화에서 이미 수많은 질문과 대답을 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지에 둘러싸인, 종말 이상으로 수많은 의문에 휩싸인 ‘태초’에 대해서 시인은 다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태초’에 대한 질문부터가 이 시인에게 ‘구도자’의 이름을 주는 것에 대해 이견을 달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태초를 향한 길을 가는 것은 어떤 길이며, 어떻게 가야하는가. <공중에서부터 집짓기․2>의 ‘열매는 / 왜 허공에서 씨를 얻는가>란 질문이 암시하듯이 그 길은 일상적인 현실이 아니다. 열매가 뿌리에서부터 양분을 얻어 씨를 얻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얻는다는 것은 비일상적인 것,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비일상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은 역설적으로 손종호만의 존재론적 질문을 하게 만드는 토대이다.

    금빛 물고기여, 아는가. / 먼 상류에 영원은 안개처럼 젖어 있고 / 그 뿌리 깊은 신비의 땅은 결코 밝아오지 않는다. / 드러나지 않는 / 아득한 비의秘義 / 오직 별빛으로 빛나는 자리에 / 귀향의 연어조차 / 제 스스로의 힘으로는 /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 한 마리 새여, 아는가. / 높은 산정에서 이성은 얼음처럼 빛나고 / 그 만년설의 웅혼한 힘은 / 결코 녹아내리지 않는다. / 부숴지지 않는 / 견고한 율법 / 그 눈보라치는 자리에는 / 갈색의 독수리조차 / 강철의 날개로도 / 끝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불의 산정에서> 중 1

    시인은 금빛 물고기에게, 한 마리의 새에게 묻는다. 모르는 것에 대해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자신도 익히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 바로 안 될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공간, 혹은 시간에 관한 질문이다. 그런데  <공중에서부터 집짓기> 연작에서 보았듯이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길은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출발하여 갈 먼 곳 어디가 아니다. 반대로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된 출발점, 자신의 연원, 하류가 아닌 ‘먼 상류’, 즉 ‘태초’이다. 그곳은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인 까닭에 ‘영원’의 시간이며, ‘부숴지지 않는 / 견고한 율법’을 지닌 공간이다. 그래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자신의 태어난 고향을 찾아간다는 ‘귀향의’ 귀재인 ‘연어조차’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아득한 비의’로 가득 찬 공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 곳에 도달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에서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도강>에서 시인은 ‘캄캄한 천공에서 / 더욱 자유로운 / 스스로의 높이에서 빛나는 / 별’을 이야기 하며 ‘목선도 신발도 없이’ 그러면서도 ‘발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강을 건너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시인이 이미 ‘주검’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을 통해서만 그 길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하여 ‘천상의 길’을 가는 것을 그만 둘 수도 없으며, 그에 대한 질문을 멈출 수도 없다. <피 속으로의 여로>에서 시인은 ‘길을 찾아 나서면 / 길을 언제나 내 집으로 닿는다. / 대문에는 시초의 낯익은 달빛이 두려운 지문처럼 찍혀 있고, 내 방은 깊어가는 어둠의 자궁, / 어느새 바람소리에 떠내려 간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비일상적인 것, 비현실적인 것에 ‘천상의 길’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상에 현실에 발 딛은 사람으로서 일상과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길을 찾아’ 떠나더라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내 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집 역시 단순히 거주를 위한 건축물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방은 ‘태초’와 직결된 ‘자궁’이며, 이 ‘자궁’은 바람소리와 같이 가벼운 것에도 떠내려 간다. 시인은 그 떠내려 가는 자궁에서 ‘아담’과 ‘곰과 호랑이’를 떠올리며 ‘보이는 길’이 시작되는 ‘나’와 ‘보이지 않는 길’이 매몰되는 ‘나’에 대해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 아쉬움과 안타까움에는 어떤 깨달음이 가려져있다. 시인은 이 지점에서 자신 그 자체가 앞과 뒤가 없는 뫼비우스의 띠, 시작과 끝이 맞물린 우로보로스와 마찬가지로 이미 시작과 끝, 태초와 종말,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비현실을 가로지르는 경계이자 허물어진 틈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외에도 <구름다리> 연작, <마지막 假官에서> 연작, <天上天下唯我獨尊․․․尊>, <문>, <별>, <별들의 처마에> 등 웅장하고 한편은 절실한 어조로 ‘천상의 길’을 찾는 구도자의 노래로 《새들의 현관》은 가득하다. 사실, 구도자의 노래로만 시집이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니나, 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구도자의 웅장한 어조가 가장 오래 또한 가장 강하게 여운에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덧붙여 제목에 관해 한마디 하자면, 새들의 ‘현관’은 새들이 지나다니는 길 없는 하늘에 위치한 새들만의 출입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와 동시에 불교에서 말하는 ‘깊고 묘한 이치에 드는 관문關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시집 전체에서 풍기는 구도적 분위기뿐 아니라 <부석사>나 <신원사의 가을>처럼 불교적 분위기가 압도적인 몇 편의 시들 때문에 후자가 더 적절할 것 같기도 하다.

    ‘출석하지 않은 신’을 대신하여- 김만수, 《산내통신》

    우리는 엄청난 재해 앞에서 처참하게 피해를 받아 망연자실할 때, 착한 사람이 매우 심한 고통을 받거나, 악한 자가 승승장구하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신을 호출했다가 이내 그의 부재를 실감하기도 한다. 착한 사람, 악한 자가 명명백백하게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날 티그리스 강 먼지 속의 미사에 / 신神은 출석하지 않았다 / 짓밟혀 쓰러지고 하늘 강으로 뛰어내린 / 순례자 순례자들 / 그들 영혼의 집을 얹었던 수천의 신발들 / 다리 위에 강물 위에 엎어져 / 저녁기도 따라 하늘로 흘러가지 못했다 / CNN 카메라가 그 신발들 / 다 신어보는 저녁만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구릉 뉴올리언즈 / 신神은 언덕 아래 그늘에서 망고 즙을 주사하고 있었다 / 목화씨를 담았던 검은 / 영혼을 얹어 끌고 다닌 신발들 / 사탕수수 이파리들 밀려 밀리며 / 물 위에 오래 떠있었다 / 배수 호스에 빨려 들어가는 신발들 / 하늘로 가지 못했다 / 돔 구장 천장에 뜬 젖은 달만 / 그들 감기지 않는 눈 속으로 / 툭툭 뛰어내리고 있었다
    -<신발>

    김만수의 <신발>을 읽으면 고흐의 <구두>가 떠오른다. 고흐는 <구두>, <세 켤레의 구두>,  <낡은 구두> 등 몇 편의 구두를 오브제로 삼아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한 켤레의 농부의 신발을 묘사한 <구두>에 대해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을 응시하고 있으며, 이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다. 구두창 아래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깃들어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는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신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과 아기의 출산에 임박한 초조함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 스며들어 있다.”라고 말한다.
    김만수의 신발 역시 고흐에 구두에 대응하는 내면의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티그리스 강 먼지 속의 미사에 참석한 순례자들이 벗어놓은 수천의 신발들과 바다가 보이는 뉴올리언즈의 물 위에 떠 있는 신발들. 그 신발들만 따로 물 위에 떠 있기 전에는 도착하지 못하는 CNN 카메라는 상황 종료 후에 도착해서는 오히려 상투적인 어구로 그 풍경의 비참함을 강조할 것이고, 시인은 정지된 화면 속 신발들을 보며 그 신발들의 틈 속으로 그들의 생애를 유추해가며 내면을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이 신발들이란 도구 밖으로 그 신발들과 그 신발들을 신었던 사람들의 생애가 겹쳐지며 신발들만 남아 출석하지 않은 신神을 생각하며 떠다니는 장엄하면서도 비참한 풍경은, 마지막임에도 ‘감기지 않는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처럼 허망하고 애처롭다.  
    그런데 이처럼 극단적인 풍경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시인이 보기에 우리들의 일상에는 자그마한 틈 밖으로 내면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람과 사물들이 있다. 시인은 신이 아니기에 그 모두를 구원해줄 수는 없지만, 그들이 내보이는 혹은 숨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꺼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내민다. 표제시이기도 한 <산내통신> 역시 그러한 시 중 하나이다.

    그 겨울 동안 체부는 오질 않았습니다 / 낡은 가죽 가방의 그가 편지였던 시절도 / 꼴삭한 햇살과 걸쭉한 입담이 / 등기처럼 배달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 느릅나무 이파리들 불티처럼 날리어 가고 / 푸른 알을 낳던 숲에는 / 잦은 가랑이를 말리는 감나무들 처져 섰는데 / 아무도 그 마을의 소식을 빼내가지도 / 거친 눈발 속에서 빚어진 일들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습니다 / 털갈이를 앞둔 개 몇 마리 얼어 죽은 일과 / 캄보디아 색시가 새벽 운문재를 넘어간 일이며 / 조합장네 사위가 바람 난 일 / 걸어서 건너는 저 시린 겨울을 / 아무도 유심히 보질 않았습니다 / 노망기 도진 할머니가 연신 숟가락을 빠는 동구 앞에는 되돌아오지 않는 눈발 / 다시 치고 있었습니다
    -<산내통신>

    겨울 동안 우체부가 오지 않은 까닭은 이메일과 문자메시지 때문인지 모른다. 이제 시골 마을을 떠난 아들과 딸들이 곧잘 자신의 생활을 전하고 남아있는 부모님 안부를 묻던 정감어린 편지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시인은 노래한다. ‘아무도 그 마을의 소식을 빼내가지도’ 않는, 아마도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 마을의 소식을’ 아들과 딸, 그리고 우체부를 대신하여 시인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소식은 ‘털갈이를 앞 둔 개 몇 마리 얼어 죽은 일’, ‘캄보디아 색시’가 야반도주한 일, ‘노망기 도진 할머니가 연신 숟가락을’ 빠는 일 등이다.
    이런 소식은 뉴스에 나오기에는 좀 작고 사소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일이 하찮다는 것은 아니다. 털갈이를 앞 두고 얼어죽은 개는 막 자라나는 생명이 죽은 듯이 애틋하고 캄보디아 색시가 야반도주한 것도 그렇게 하기까지의 속사정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젖어든다. 노망기 도진 할머니가 동구 앞에서 연신 숟가락을 빠는 모습 역시 애처롭다. ‘푸른 알을 낳던 숲’은 이렇게 ‘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고, 이렇게 힘겹게 보내는 겨울을 ‘아무도 유심히 보질 않’고 있다. 사실, 더 슬픈 일은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애처럽고 슬프고 힘들다 하더라도 누군가 관심을 갖고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면, 자신의 힘겨움에 대한 하소연이라도 들어주면 조금은 덜 힘들지 않은가. 시인은 지금 그런 귀기울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시인은 구구절절하게 그들의 사연을 늘어놓지도 자신의 따뜻한 시각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압축적이고 함축적으로 잠시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 담겨진 가슴 저미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숨길 수는 없지만. <문신文身>과 <철암지업사>, <구룡포-돌산 이모>, <국도-노숙> 등 많은 시들이 그러하다. <문신>에서는 ‘한 때 세상의 중심을 향해 / 추를 달아 내린 적이 있었다는’ 사내가 나오는데, 그는 지금 ‘흔들리는 극지에서 꺾이고 있’으며 ‘날아오르지 못하는 / 충전되지 않는 날개를 가진 새’만이 팔뚝 속에 함께 하고 있다. <철암지업사>에서는 ‘태백선 붉은 기차는 차가운 풍경을 붙이고 / 자꾸 떠나고 /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산자락’만이 남아 있는 ‘허물어진 막장’이 청춘 시절 번성했던 모습과 대조되어 을씨년스럽게 묘사되어있다. <구룡포-돌산 이모> 역시 <문신>이나 <철암지업사>와 마찬가지로 화려하고 번성했던 시절과 거리가 먼 모습이 과거와 대조되어 나타난다. ‘당산 목 위로 펀하게 열리던 바다 / 지금은 아파트 옥상에 걸려 / 쭈그리로 앉은 바다 / 쭈그리고 앉은 / 돌산 이모’와 같이 말이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대조 속에 초라해지고 왜소해진 풍경을 가슴 시리게 바라본 것과 조금 달리, <국도-노숙>에서는 ‘눈두덩이 찢기고 그늘을 뒤집어 쓴 사내들 / 자꾸 쓰러지는 그들과 / 겨울 아이스크림을 들고 가는 여자들’이 대조되는데, 시인은 ‘저 얼룩진 풍경들이 /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음’을 못내 우울해 하고 분노하고 있다. 이 우울함과 분노는 앞서 살펴보았던 가슴 저미는 따뜻함과 다른 것이 아니다. 나약하고 왜소한 대상에게 자연스럽게 발로되는 따뜻함과 같은 매커니즘으로 그 나약하고 왜소한 대상에 무관심함으로써 힘겹게 만드는 데 일조하거나 혹은 아예 그렇게 만드는 기제에 대해 시인은 우울해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우울함과 분노는 날카로운 풍자와 비틀기로 나타나는데, <국도-등본>과 <이름>, <밍크밍크>, <그들의 출판기념회> 등이 그러하다. <국도-등본>에서는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들에 이르기까지 삼대에 걸친 국방의 위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와 나는 / 갑종 혹은 1종 등짝을 맞고 삼 년씩 / 나라에 나갔다가 등본으로 돌아왔다 / 살아서, 다리 잃지 않고 / 푸른 스캠프 찍힌 이마로 돌아와 / 제자리에 꽂혔다’와 같이 이 국방의 위무는 애국심이나 충성심과는 거리가 있는 <수난이대>의 박진수와 달리 ‘살아서, 다리 잃지 않고’ 돌아온 것이 다행이며, 그저 등본에 병역을 다했다고 스탬프 찍힌 것으로만 의미를 지닌 것이다. <이름>에서는 ‘만약의 경우 아내가 식당 일에 나가 버틸 수 있다는 여러 가정들이 나에게 / 쑥쑥 돈을 내주는 것이리라’라며 자신의 재정 능력과 아내에 대한 ‘알량한 믿음’으로 아무렇게나 신용카드를 긁다가 급기야 ‘현금지급기 털이범’이 된 사내의 이야기가 다소 거리를 둔 채 흘러나온다. <밍크밍크>에서는 ‘여기 광합성이 멈춰버린 불임의 숲에선 휘어진 등짝 세워 돌아오는 너희 길을 복원하기 위해 환경을 얘기하는 젊은이들을 조심조심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다’에서 보듯이 ‘광합성이 멈워버’릴 정도로 파괴된 숲과 휘어진 밍크들, 환경보호론자들의 주장이 묻히고 마는 모습이 냉정하게 그려져있다. <그들의 출판기념회>에서는 제목에서부터 비아냥이 묻어나는데, ‘이맘 때 쯤이면 선거에 출마한 그들의 / 절제와 성취가 소보록한 미농지 여기저기 팔락거’리고 ‘그들은 표지 위에 지사志士의 미소로 멈춰 있다’며 이러한 모습에 대해 시인은 ‘재밌다재밌다’며 환호한다. 물론 이 환호는 반어이며 냉소일 터이다. 시인에게 ‘그들’만의 ‘출판기념회’는 ‘오래 젖은 세탁물’처럼 냄새나고 역겨운 것이며 진실되고 가슴 울리는 슬픔이 아니라 ‘박제되고 표본된 슬픔’인 까닭이다.
    김만수의 《산내통신》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어조의 시들이 섞여있지만 그 내밀한 말하기의 속뜻은 앞서 말했듯이 비슷하다. 이 시집에서 시은은 출석하지 않은 신을 대신하여, 소식을 전하러 오지 않는 우체부를 대신하여 시인의 일상, 즉 주변 사람들과 사물이 반쯤 내보이는 틈을 향해 바싹 귀를 기울인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를 더 보자.

    아직도 어머니를 파먹고 있다 // 고향집 뒤란 그녀의 간장 독 속에는 ‘ 알금알금한 망사주머니인지 삼베주머니인지 / 어머니의 기술이 숨겨져 있는 것인데 / …중략… / 묵은 간장이 깊은데 / 거기 어머니의 길이 / 끝도 없이 무너져 내려 / 짭쪼롬하게 웅크린 그녀의 통로가 있다 / 싱거운 세상의 길 / 그녀를 파먹으며 이만큼 왔다
    -<간장 독>

    시인은 흔히 일상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옳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인이 어떤 일상을 어떻게 노래하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들도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시들이긴 하지만,  <간장 독>은 시인이 일상을 어떻게 노래하는지 보다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저 흔한 간장 독 하나에 시인은 어머니의 생애와 사랑과 희생을 담아놓는다. 가장 독에 담긴 것은 알맞게 익은 간장이기도 하지만, 시인을 이만큼 살아올 수 있게 만든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직도 어머니를 파먹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간장 독’이란 흔하디 흔한 일상적인 사물에서 그 사물의 내력과 상징을 퍼 올리고 거기에 은근한 깨달음과 따뜻함을 덧씌우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의 힘일지도 모른다.
    약력-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 수료. 동양공업전문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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