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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의 시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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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곽명숙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981회   작성일Date 07-07-0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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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새로움, 시의 해석력 곽명숙 1. 조용한 축제 지난 해부터 시단에는 모종의 활기가 들끓었으니 이를 두고 조용한 축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문화계 전반의 침체, 문학의 비중 축소, 독자 감소 등과 같은 외적 상황은 어느 시대이든 문학자의 걱정과 탄식거리였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소설 전문 잡지의 부재에 비하면 실로 놀라운 수의 시 전문 잡지들이 활성화되어 계절마다 대단한 양의 작품들을 쏟아내었고, 무엇보다 시단 내부에서는 젊은 시인들의 약진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들의 활동은 동인지나 무크지로 자신을 알렸던 전시대의 젊은 시인들에 비하면 기성 문학잡지의 전폭적인 관심과 호의 아래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잡지들 간의 특이성은 줄어들고 오히려 한 잡지 내에 등단연도에 따라 수록된 차례에서 읽히는 이질성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단의 진정한 활기는 난해하고 해독불가능할 만큼 눈에 띠는 새로운 시들 때문만은 아니다. 애정과 여유를 가지고 읽어 보면 주체의 안정성과 견고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완성도 높은 시들을 중앙이든 지방이든 여러 문예지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로 시인들과 중견 시인들은 여전히 젊음을 자랑하고 있다. 비록 영상문화에 몰리는 대중의 관심에 비해 독자 수는 미미하고 시의 베스트셀러 시대는 가버렸을지라도 우리 현대시는 풍성하고 볼거리 많은 축제를 조용히 벌이고 있다. 그러나 진열만을 위한 볼거리라면 그것은 그들만의 축제일 것이며, 정신이 사라진 축제는 시장에 불과할 것이다. 2. 새로운 주체들, 그들의 놀이 ‘70년대생 2000년발’이라는 세대론적 범주로 묶이는 젊은 시인들은 아직 적절한 명칭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새로운 서정의 출현’이라는 관심을 받으며 시의 영토를 획득해 나아가고 있다. 전통적인 서정성을 해체하며 감각과 주체의 근본적인 쇄신을 모색하려는 이 도전적이고 발랄한 젊은 몽상가들은 주체의 혼란과 분열상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들의 시에 담긴 서정성은 낯선 정체성을 보여주어 정체불명의 이방인이거나 심지어 외계인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사물의 재현 대신 내면의 유동적 에너지와 충동적 이미지를, 세계와의 화해 대신에 그로테스크한 불화를, 그리고 집요한 시적 자의식과 파격적 형식을 추구한다. 그들의 시적 경향은 시사에 새로운 절개선을 만들고 있는데, 이 절개선을 형성시킨 외적 조건은 일차적으로 1970년대 이후 고속 성장한 한국 경제의 문화적 파생물들이다. 젊은 시인들의 공유된 성장 체험, 특히 영상문화인 영화, 만화, 컴퓨터 등과 관련된 기억들은 이들에게는 기본기이고, 하위문화적 코드와의 혼종성은 그들의 필살기이다. 그 이전 세대가 완숙된 서정 미학과 치열한 현실 미학의 두 갈래 길에서 수련과 고뇌의 아픔으로 성숙하였다면, 이들은 내면과 감각을, 상상과 현실을, 문자와 영상을 뒤섞는 난장(亂場)을 벌이며 그 다산성을 자랑한다. 시의 독자를 소설과 영화에 모두 빼앗기고 말았으며, 영화야말로 누구에게나 손쉽게 전달되는 대중문화의 지배자라고 판정을 내린 것은 1930년대의 평론가 김기림이었다. 신문기자로서의 그의 감각이 유난히 재빨랐던 것은 아니다. 미국 디즈니사에서 화려한 칼라와 소리로 오늘날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첫 극장용 장편애니매이션 <백설공주>를 만든 것이 1937년이었고, 지금도 패션 아이콘이 되고 있는 오드리 헵번이 <로마의 휴일>로 대중을 사로잡은 것은 전쟁의 잿더미 아래에서 한국 문학은 겨우 숨만 이어가고 있던 1953년이었다. 대중문화가 영상과 소리를 통해 언어의 위력과 미적 수사력을 시로부터 찬탈해 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제 고전이 된 영화들은 세익스피어나 논어 못지 않은 불멸을 얻고 있다. 칼라 TV가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를 유년기로 보낸 젊은 시인들에게 자신들의 상상력을 키운 이러한 현실과 다른 시적 세계를 따로 상상한다는 것이 오히려 허구적일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인들의 게토는 새로운 유목민적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그들의 이미지와 의식과 정체성은 TV의 채널을 돌리듯 인터넷의 마우스를 클릭하듯, 한 곳에 정착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무작위로 링크(link)된다. 시의 유기적이고 완결된 형식과 단일한 시적 자아는 거부되고 전략적인 글쓰기로 언어와 의식을 전복시키고자 한다. 젊은 시인들의 극과 극을 달리는 다양한 개성은 서로간의 차이와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앞서 등단했던 시인들까지 새로운 게토로 소환하고 있다. 그들의 글쓰기가 분열적이고 복수적인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환타지는 몽상과 글쓰기의 열락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소통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시를 두고 요설이나 장광설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지만, 이러한 변화는 다른 문화 영역에 비해 뒤늦은 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유목민적 상상력이 기존의 시에 대한 관념에 균열을 내며 시적 활기를 추동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만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때 비평계에서는 문학권력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것은 1980년대의 소모적인 이론논쟁처럼 창작을 자극할 만한 정신적 자양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시의 창작에서 문학권력은 부차적일 수 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작해낸다고 할 때 창작자가 고심하는 것은 새로운 시적 서정이나 그와 걸맞는 새로운 시적 육체가 아닐까. 한 평론가가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라고 선언했듯이 현대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서 이것은 더욱 중요하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어린 시절 수수깡 인형이 아닌 플라스틱 프라 모델을 가지고 놀던 젊은 시인들의 시에 등장하는 주체와 육체의 감각은 곧 그들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아직 젊은 시인들은 육체를 조립 중이거나 반죽 중이며 그들에게 정체성과 육체는 견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저 사나운 아가리에서부터 신성한 똥구녕으로 이어지고 마는 배아지 속으로, 멀쩡히 그가 나를 끌고 들어온다 이 길고 둥근 통로에는 거칠고 반짝이는 비늘은 없으나 보드라운 살이랑 물컹하게 출렁이는 바닥과 벽, 에 달린 어둡고 축축한 문들 미끌미끌한 손잡이가 몇 개씩 달린 그 많은 문들의 주소 알 수 없고 그 문들 열리기가 안으론지 바깥으론지 또한 가늠할 길 없는데 해설라무네 여기는 그의 배아지 속일거나 내 배아지 속일거나 내 먹이일거나 그가 그의 먹이일거나 내가 아니면 그와 나는 또 누구의 여태도 소화되지 못하고 썩은내 풀풀 풍기는 살점이나마 듬성듬성만 붙어 있는 뼈다귀일러나, - 김근, 「복도들 1」 부분 근대적 이성이 주체의 단일성을 위해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서양과 동양, 남성과 여성 등과 같은 이분법을 전횡하고 전자에 특권적인 지위를 주었다는 것은 여러 철학자들이 비판하는 바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시적 주체가 보이는 분열과 혼란은 이런 근대적 이성에 대한 도전이자 치유의 전략이다. 위의 시는 그러한 전략을 근대적 이성에 의해 배제된 것에서 빌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끌미끌하고 물컹한 감각, 비표준어, 안팎의 구분없는 혼돈, 문법적 휴지와 문장 구분의 무시 등을 통해 시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복도라는 사물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뒤바꾼다. 환각처럼 그것은 몸 속의 내장을 연상시킨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도시 체험과 영화적 상상력, 서구 문명과의 이종 교배가 낳은 감각을 다루고 있는 데 반해 위의 시인은 보다 원형적이다. 다른 시인들의 시에 등장하는 주체가 사이버스페이스의 아바타라든가 플라스틱 프라모델을 닮았다면, 김근의 시에 등장하는 주체는 수많은 문자적 하부텍스트를 뱃속 가득 삼키고 있으면서도 원시적 동물성에 충만해 있다. 마치 성서를 비롯한 수많은 신화와 설화가 연상되면서 즉자적인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뱀’과도 같이. 그의 이야기체는 기성 시인 못지않은 능청스러움과 유장함을 가지고 있지만 예민한 자의식과 고독한 주체성을 날카롭게 그러나 유동적이고 분산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젊은 시인들에 공통된 새로운 주체와 감각의 출현을 보여준다. 이 시는 전체가 한 연과 한 호흡으로 꿈틀대는 에너지이자, 복도의 연결이고, 흐름의 덩어리이다. 문법마저 무시하며 명사와 조사 사이(“바닥과 벽, 에 달린”, “축축 늘어지는 말, 이 흘리는”), 한 단어 사이(“바람 한 줄기 지나, 간다”)에까지 쉼표가 찍혀 있다. 시의 끝부분마저 쉼표로 끝나며 “행방마저 그만 묘연해져버린 나는,”이라고 주체의 망실감과 정체성의 실종이 표현된다.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모호한 채로 욕망의 심연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점액질의 감각을 동반하며 드러난다. 감각이 선명하게 꿈틀거릴수록 ‘나’라는 주체의 묘연한 행방이 아득한 카오스처럼 입을 벌리고 나타난다. 젊은 시인들 특유의 ‘환상성’이 매혹적으로 개입되는 부분이 이곳, 감각과 주체 사이에 입 벌리는 이러한 심연인 것이다. 죽어보지 않아서 죽기 살기로 살아보지 않아서 내가 실감하지 못하는 거라면 조사(助詞)가 생겨나고 있는 문장처럼 물음이 제기되고 있는 정답처럼 어두움이 풀리고 있는 저녁처럼 후각이 회복되고 있는 개처럼 얼어붙기 시작한 저 빙판처럼 너의 악몽은 실현되고 있는 중이었니? 들어봐, 생겨나는 달무리를 향해 짖는 복고적인 개소리 오열을 시작한 두 눈아, 오래 보려면 깜박거렸어야 했어 캠코더 기사는 그을음투성이 천장과 살인자와 그의 아기를 쉼없이 찍어대고 노트북에 시상(詩想)을 받아쓰고 있는 죽어가는 노파의 자식 실연은 도구가 되었지만 이미 본 것 저수지 근처 방에는 시멘트가 마르지 않아 우리는 서로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고 입술도 열지 않고 천장을 보았지, 다음 날 저녁이 기다릴 줄 알았거든 오, 인내심으로 해가 떠오르는 거라면, 지겨워라 물담배를 빨며 보류하느라 생이 타오르지 않아 둥근 천장 아래서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요, 더 빨리 구름 속에서 놀다 나온 달은 더욱 훤하고 나는 너를 업고 훨씬 가볍다 내일도 눈이 빨개지도록 죽어볼래? 까끌까끌한 바닥으로 쿵, 내려가서 광장과 수많은 골목을 지나 저수지 위를 달리는 개 떼들과 함께, 발이 시리겠지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해로운 시간을 말라도 굳어지지도 않는 악랄한 엉덩이를 자, 시작한다 얼마나 심심했으면 - 김이듬, 「시체놀이」 전문 통사적인 의미 구문을 해체하는 것은 젊은 시인들에겐 오히려 익숙한 어법이다. 그것이 이들의 시를 난해하게 보이는 이유이다. 또 다른 난해함의 이유는 주체의 뒤섞음이다. ‘내가’로 시작한 시는 ‘너’, ‘우리’를 뒤섞어 놓고, 사물에 대한 표상과 세계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해석이 응축되거나 사물에로 전이된 중심적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인 이미지들만으로 떠다닌다. 그러나 특별한 수사도 없이 툭 뱉는 일상적 말법, ‘인내심으로 해가 떠오르는 거라면, 지겨워라’, ‘둥근 천장 아래서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요, 더 빨리’와 같은 부분은 자동화된 우리의 감각에 충격을 준다. 이런 낯설게 하기를 두고 시적이라고 하여도 쉬클로프스키는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단일한 주체나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는 구문과 이미지들은 어느 곳에도 구속되지 않고 유희하듯 의미를 발산한다. 죽음에 대한 실감이 없는 시적 자아는 ‘타오르지 않’는 생을 ‘심심’하기 짝이 없는 ‘시체놀이’로 비유하며 냉소적으로 대한다. 이 조숙한 몽상가의 “시체놀이”는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해로운 시간’을 권태롭지 않도록 균열내는 시쓰기이자 생에 대한 포즈인 것이다. 이 놀이는 사유를 파열시키고 이미지를 의미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게 한다. 일상 속에서 우리의 감각과 주체가 늘 조화롭고 의미로 가득 차 있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나의 주제로 통일된 글쓰기를 하는 주체는 늘 그러한 불화를 애써 숨긴다. 젊은 시인들이 세계와 주체에 보내는 회의와 냉소의 시 쓰기는 그러한 감각과 주체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모험이거나 놀이이다.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빠른 변화로 감각과 주체를 뒤흔드는 이 심연을 대면해야 하는 것은 젊은 시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3. 보편적인 것은 낡지 않는다 주체를 해체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주체에 대한 집착을 반증하며 주체의 미로에 갇혀버리는 것일 수 있다. 오히려 고집스런 주체를 잊어버림으로써 일찍이 서정 시인들은 그 심연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서정시가 지닌 자연과 세계에 대한 고요한 통찰은 자아를 세계로 확장하며 인간적 존재의 심화를 열어준다. 지난 2006년 여름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린 젊은 작가 페스티발의 주제는 ‘새로운 문학’이었지만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확인한 것은 ‘새로운 것이란 없다’라는 것이었다. 새로움을 위해서는 오히려 고전들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따라야 하고 문학은 이미 반복되어 온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인식을 통해 다른 표현을 찾는 것일 뿐이다.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적는 것만으로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안되겠다면 도리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 이성선(李聖善) 시인(1941~2001. 5)의 「다리」전문과 「별을 보며」첫부분을 빌리다. - 김사인,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전문 공들인 시 한 ‘벌’의 탄생은 위의 시에서처럼 참으로 겸허하고 깊은 헤아림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다리를 너무 빨리 건너가 다리를 허전하게 남겨두지 않도록, 시를 ‘너무 빨리 읽고 지나치’지 않는 마음. 그것이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이고 또 시를 읽는 마음이라는 전언 앞에서 너무 일찍 세상에 절망하는 포즈를 취하는 우리의 짧은 인식을 반성하게 된다. 다른 이의 시를 공들여 읽고 옮겨 적음으로써 시인은 세상을 공손한 마음으로 읽고 간 시인의 시를 다시 살아나게 한다. 자연과 세계를 시로 옮기고 싶은 욕심이 행여 저절로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을 더럽히지 않을까 두려워할 줄 아는 시인의 마음은 주체와 세계 사이의 심연이 아닌 초월적인 이해의 깊이로 다가온다. 더불어 이 시가 취한 인용이라는 독특한 구성은 서정시가 단일한 주체의 틀을 벗어나 타인의 사유와 자연스럽게 몸을 섞는 폭넓음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서정시의 위의는 이처럼 세계에 대한 새로운 눈뜸에 있지 않겠는가. 원숙한 시인들의 시를 읽는 즐거움은 대개 그러한 경험을 동반한다. 연륜을 앞세운 설교가 아니라 그들의 시에서 인간의 존재와 인생의 역정을 되돌아보는 예지와 통찰을 만나는 것은 시만이 줄 수 있는 찰나이지만 영원에 맞닿는 희열이다. 저녁 어스름이 장엄하다고 말했던 노시인의 죽음을 넘어서 저녁 어스름이 찾아온다 의자 없는 별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산등성이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말들 고삐가 없어서 일월日月을 고삐로 삼고 마구간이 없어서 천하를 다 마구간으로 여기는 말들 말들은 죽을 때 바라는 것 없이 그냥 죽는다 저녁 어스름이 장엄하다고 말했던 노시인의 죽음을 넘어서 저녁 어스름이 찾아온다 말들이 목을 늘어뜨리고 저녁 어스름에 잠긴다 나도 저녁 어스름에 잠긴다 - 최승호, 「저녁 어스름」 전문 어느 노시인의 말과 우주적인 배경에서 전개되는 하루의 한 때가 위의 시에서는 상징적이며 다층적인 의미로 어울리고 있다. 하루가 저무는 ‘저녁 어스름’은 천지를 달리는 말(馬)에 비유되어 해와 달이 고삐가 되고 천하가 마구간이 된다. 소멸을 의미하던 황혼은 이 비유를 통해 역동적인 힘을 응축한 때로 해석된다. ‘의자 없는 별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내려오는 그 시간은 쇠락이나 패배가 아닌 ‘바라는 것 없이’ ‘그냥’ 죽는 시간이다. 끝없는 욕망의 올가미로부터 풀려나 주체의 망집이 해소되는 시간인 것이다. ‘노시인’의 이미지는 ‘말’(馬)이라는 어휘에서 또다른 ‘말’(言)을 연상시킨다. 천지간에 내달렸던 시의 언어가 지닌 운명도 저러할 것이다. 하루 해의 죽음과 노시인의 죽음, 태양의 말과 시의 말, 그리고 ‘나’의 황혼이 중첩되며 이 시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이 친근하며 새로운 이미지들은 본질과 만나는 듯한 느낌과, 세계의 비밀과 우리가 조화를 이룬 듯한 숭고미를 마음 속에 일으킨다. 이 순간 신비로운 베일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세계가 드러나는 듯하다. 4. 세계를 재생시키는 해석 매튜 아놀드는 시의 위대한 힘은 해석력에 있다고 한 바 있다. 시인의 해석력은 우주의 신비를 흑백으로 분명하게 그려내는 힘이 아니라, 사물과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놀랍도록 새롭고 친근한 느낌으로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도록 사물을 다루는 힘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 19세기 비평가의 신비주의적인 말이지만 시가 지닌 보편적 감응력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주체를 구조화한다는 정신분석학의 주장에 반기를 들 마음은 없지만, 시인은 의사가 등장하기 이전 부족을 치료하던 주술사의 후계자이며, 정신분석학이 나오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정신의 치료사이지 않은가. 시인이 사물을 다루는 언어는 세계에 대한 보다 깊은 해석을 통해 탄생한다. 보편적인 감동을 주는 시는 결코 낡지 않는다. 그 새로움이 오래된 것일 뿐, 시가 세계를 드러나게 한 해석은 독자가 읽는 순간마다 세계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약력 : 1970년 경기 출생. 1999년 <시와 시학>에 시로 등단.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졸업.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전임대우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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