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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과 길항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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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댓글 6건   조회Hit 2,482회   작성일Date 07-07-03 17:24

    본문

    <우리시대의 시정신>
                             모순과 길항의 변증법                                

          
                                                                                 김 명 원

      황제가 시인을 초청하여 자신의 궁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길게 늘어선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마치 광활한 경기장의 계단들 같은 첫 번 째 테라스를 지났다. 다음으로는 금속으로 된 거울들이 장식 된 눈부신 대기실과 끝이 없이 연결되는 무지개빛 대리석의 서재들, 그리고 은가루의 마당을 지나 백단향으로 만든 카누를 타고 수목으로 뒤덮인 수많은 강들을 지났다. 현실이 꿈과 혼동되어 버렸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현실이란 꿈의 여러 가지 형상들 중의 하나였다. 지상과 궁전은 오묘한 정원들과 우수에 찬 강들, 신비스런 건축물들, 그리고 빛의 여러 가지 형체들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시인이 시 한 편을 낭송한 곳은 궁전의 마지막 두 번 째 탑 아래에서였다. 시가 시인의 입에서 고통스럽도록 절절하게 흘러나온 순간, 그 시는 시인에게 불멸의 칭호와 동시에 죽음을 선사하였다. 시의 원본은 유실되어 버렸다. 그 곳에 있었던 어떤 사람은 그 시가 한 행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시가 한 단어로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사실은 그토록 짧은 시가 그 거대한 궁전 전체를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시에는 궁전에 있는 도자기 하나 하나와 그것들에 그려져 있는 하나 하나의 그림들조차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에는 숱한 밤의 적막과 장렬한 노을의 구름이 빚어내는 주홍빛깔과 소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무늬마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원을 알 수 없는 먼 과거에서부터 그때까지 제국에서 살았던 생명체들, 신들, 용들이 누렸던 파란만장한 운명의 불행했거나 행복했던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고있었던 시가 읊어지는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는 눈을 감고 경탄의 신음을 내뱉으며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죽을 듯 절망하면서 비통하게 시인을 향하여 소리질렀다.
      “네가 내 궁전을 탈취해 가버렸도다!”
      망나니의 쇠칼이 번쩍 들리고, 시인의 목은 무참하게 베어져 버렸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다른 방식으로 말하곤 한다. 세상에는 똑같은 두 개의 물체가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시인은 마지막 음절과 함께 탄생한 언어의 집을 축조하는 대신 궁전이 사라져버리도록 하기 위해 그 시를 낭송했을 거라는 것이다. 시인은 그래서 죽음을 당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시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결코 발견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 이야기는 보르헤스(J. L. Borges)의「궁전에 관한 우화」를 요약한 것이다. 황제는 자신이 누리는 부와 권력의 영광을 부단히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초대된 시인의 예술적인 입을 통해 확인 받고 칭송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황제의 무한한 권위에 경의를 표하기는커녕, 궁전의 광대하고 고혹스런 아름다움에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어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시 한 수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었을 테고, 그것은 예상을 뒤엎게도 황제의 모든 궁전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시인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시가 담지하고 있는 극도로 위험한 본질적 자장력이다. 시가 그려내는 본원의 힘이란 얼마나 당돌한 것인가. 황제가 자신이 평생 가꾸어 온 궁전의 모든 것을 도둑질 해 버렸다고 자탄해 마지않았던 시의 도발성이란 얼마나 불온한 것인가. 이는 시가 실체를 삼키고 주제를 삼키고 역사를 삼키는 초월의 방식에 도도한 노정이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보르헤스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다지도 위험한 시를 발설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존재이다. 시인의 비의성이 예시의 능력과 포월의 본성을 능가하는 점에 있어서 예언자나 입법자로 불리워졌던 점을 상기한다면, 바로 이러한 언어의 창조성에 대한 관념이 밑받침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시어의 형상성으로 집적되는 단행의 시 한 편에 삼켜지는 궁전의 실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반대로 황제의 무한 권위에 도전장을 내미는 시인의 위대함은 얼마나 외경스러운 것인가. 그리하여 황제가 시인을 참아내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의 고도의 응축력, 즉 단숨에 본질을 투사하여 실물을 대체하기까지에 이르는 놀라운 마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때의 힘은 창조로서의 힘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손에는 잡히지 않지만, 영혼의 뿌리마저 뒤흔드는 공포를 선사하는 창조란 단순하게 복제된 복사의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실재의 세계를 능가하는 변혁이라는 점에서 재창조라는 명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 거리를 신선하게 선사했던 보르헤스의 시인은 죽었고, 놀라운 그의 시는 아직도 정체 불명인 채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올 뿐이다. 시인은 한 편의 시 때문에 죽었기에 기꺼운 자신의 운명을 대변할 만큼 시의 존재성을 화려하게 고지했으며, 그 시는 영원히 찾을 수 없기에 존귀하며 신비롭고 아득하게 다시금 탄생하였다. 시인과 시가 담보하는 출중한 내장 에네르기가 여기에서 발현하는 것이다.  
      지금 씌어지는 시들은 어떠한가. 아직도 가장 경계해야 할 예시성으로서의 시가 남아있는가. 어쩌면 요즈음의 시인들은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 보르헤스의 우화에서 나오는 시인이 치른 속죄양으로서의 보속을 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선행한 시로 세계를 탈취해가 버린 시인은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이 죽음으로 헌납한 시의 원형을 모방한 모사품을 빨대사탕처럼 줄줄이 빨아대며, 단 내 나는 당분에 충치가 생기는 지도 모르면서 자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해마다 모든 문학잡지에서 양산되는 시인의 숫자는 이제 더 이상 예견할 세상의 자료가 부족하게끔 만든다. 우주의 이치와 섭리를 예지롭게 판독하고 인간의 가치를 해석하면서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부단히 조명하며 아우르는 기능을 몰살당하거나 포기한 채 오늘날의 시인들은 시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시인들의 행사를 쇼핑하고, 시의 장식물들을 구매하고, 급기야는 독자들에게 먹히기 좋도록 노릇노릇하게 잘 구어진 시를 판매하기에 급급한 지도 모르겠다. 한 입에 쏙 들어가는 시, 말랑말랑하게 녹으며 쉽게 씹히는 시, 부드럽게 소화되는 시, 실연의 상처에 바르면 감쪽같이 아픔이 멈추는 시, 불면의 밤에 자장가로 불리워지는 시, 오색의 엽서에 치장되는 시, 그런 시에 더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다.  
                                                                    
    칠십 년대 말부터 미쟝센(Mise en Scene)이라는 방식의 새로운 사진 작업을 시도한 작가, 그는 1950년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태어나 철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회화작업을 병행한다. 100여 개의 마네킹을 이용해 가상의 현실공간을 구성한 뒤, 이를 마치 영화감독이 영화를 연출하듯 촬영하여 소년시절의 추억을 재현한 첫 사진집《여름방학(Les Grandes Vacance)》을 발표한다.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그는 신화적인 무대장치를 비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거울, 알루미늄 판넬, 대량의 화약까지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새로움에 사래가 들고, 새로움으로 고통을 받으며, 새로움이라는 소스가 발린 빵이 아니면 식사를 거부하고, 새로움을 위해 밤낮을 헌납하며 새로움을 찾던 그. 베르나르 포꽁이 도달한 새로움의 궁극은, 1997년부터 세계 각 도시들을 돌며 청소년들에게 일회용 사진기를 나누어주고 한 장소를 정해 마음껏 사진을 찍게 한 것이다. 수년에 걸쳐 고른 사진들을《내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는 제목으로 파리에서 전시회를 연다.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로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작가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필수적인 행위가 되어버린 시대, 사진 이미지가 깡통 통조림보다 남발하는 시대에 그는 사진작가로서 임무는 사진을 찍는 행위가 아닌 찍힌 이미지들 가운데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사진을 골라내는 것이라고, “사진 찍기를 멈춘다”고 선언한다.  

        詩가 국내에 한 해 2만 6000여 편이 발표된다고 한다. 베르나르 포꽁을 생각한다.  
        이제 시인의 역할은 시를 쓰는 시대가 아니다. 넘치는 물량의 시를 유통하는 시대이다.
        불량품을, 유사품을, 하자가 있은 물품을 고르는 시대이다. 베르나르 포꽁을 이해한다.
        최첨단 유행을 창조해 가는 시, 간혹 복고풍 이미지를 재현하는 시 몇 개를 쇼 윈도우           에 진열하고, 몇 주가 지나도 팔리지 않는 시를 재고 정리하고, 언어와 부호를 해체하여          분리 수거하는 일만이 시인의 몫이다. 베르나르 포꽁의 선언문을 모창한다.
        “시 생산을 멈춘다”
                                            - 졸시,「베르나르 포꽁(Bernard Faucon)」전문

      위에 인용한 시「베르나르 포꽁(Bernard Faucon)」에서 시적 화자는 시가 국내에 한 해 2만 6000여 편이 발표된다고 한다. 이제 이 시대는 시를 쓰는 시대가 아니라, 넘치는 물량의 시를 유통하는 시대라고 강변한다. 읽는 독자보다 읽히는 시가 무수히 생산되는 시대에서 시인의 역할은 쓰는 행위가 아니라, 시의 불량품을, 유사품을, 하자가 있은 물품을 고르는 작업이라고 단정한다. 사진 찍는 것을 멈추고 사진을 고르는 것이 사진작가의 임무라고 말한 베르나르 포꽁을 언급하면서, 최첨단 유행을 창조해 가는 시, 간혹 복고풍 이미지를 재현하는 시 몇 개를 쇼 윈도우에 진열하고, 몇 주가 지나도 팔리지 않는 시를 재고 정리하고, 언어와 부호를 해체하여 분리 수거하는 일만이 시인의 몫이라고 피력하는 것이다.
      인용시는 물적 횡포를 자행하는 현시대의 시단을 풍자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천 년대, 시가 실로 많이 쓰여지는 시대이다. 시인이 많은 시대이다. 적절한 상응의 대우가 없는데도 시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시인은 넘친다. 나는 가끔 아이들 생활기록부의 엄마 직업 난을 써야할 때,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을 때, 곤혹스럽다. ‘시인’이 나의 직업인지, 나의 본분인지, 나의 소명인지, 시인으로 불리워져 마땅한 것인지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나는 시인이며, 오늘 밤에도 잎새에 스치우는 바람결을 더듬으면서 시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를 왜 쓰는 것인가? 어떠한 시를 기다리는 것인가?
      지난 학기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마지막 시간에 학생들에게 나는 정의를 내려보자고 했다. 시란 신이 세상에 찍어둔 지문을 해독하는 시인의 주술이라고. 억누르려 해도 부표처럼 저절로 떠오르는 단 한 줄의 표현에 생명을 걸 수 있는 자가 바로 시인이라고. 시인은 현실을 기각시키지 않은 채 현실의 대지 위에 이상의 푯대를 곤고히 설치하는 언어의 건축가이며, 상징의 연금술사라고. 그러므로 시인은 죽어도 시는 영원 불멸의 날개를 달고 시간의 용광로 속에서 뜨겁게 끓어오를 것이며, 시인은 자신이 직조한 시 안에서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귀환할 것이라고 말이다.
      모든 사물들은 ‘신성한 내부’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동의한다면, 모든 생명들과 죽은 모든 영령들이 지금도 우리 곁에서 기표와 기의의 사슬을 길게, 그리고 깊이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면, 아직 우리 시인들은 엷게 꿈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르헤스의 시인이 담보하고 얻었던 시의 이데아를 찾아 먼 별빛에 흐릿한 시력을 의지하며 용감하게 길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코 재현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궁전과 합치를 이루었던 태초의 시가 그려진 지도를 더듬더듬 번역하면서, 미완으로 끝날지도 모를 두려움과 욕망을 중첩시킨 채 오늘도 시의 이정표를 두리번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영욕의 화살에 기꺼이 피 흐리며 절망하면서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곧고 정직한, 그러면서도 옳은 시정신에 대해 고투하면서, 정의 내릴 수 없는 웅숭 깊고 심오한 깊이에 괴로워하면서 어둠을 켤 것이다. 결코 위태롭지는 않지만 세상을 향해 어지럽도록 부단히 공전하는 시, 스스로 성찰하며 반성의 등불을 켜고 자전하는 시, 그런 시는 아직 시를 쓰고 써야 할 우리들의 몫일지도 모를 일이다. 궁전 모두를 갈취해 갔을 본원적인 힘은 없더라도 우리가 사는 시대의 고통과 직면하며 세계의 아름다움을 내시할 안목과 배짱과 지혜를 두루 겸비한 덕목을 키우면서, 시인들 서로 격려해 가며 부단히 가야 할 눈부심은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들이여, 나여. 오늘도 우리는 배부르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고, 진실을 향해 불행하지도 않기에 시를 심는다. 더 배고프고 더 행복하고 더 불행해지기 위해서 넘치도록 많아 척박한 시 밭에 거친 시 한 그루를 오늘도 아프고 즐겁게 심는다. 그것은 길항을 멈추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피어나는 이 시대 시의 속성이며,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시인의 천형 같은 운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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