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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익호, 유성호의 비평집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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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61회   작성일Date 09-02-02 11:10

    본문

    존재의 심연에 대한 시적 해석과 덧붙임

    김홍진


    언어라는 기호를 만들어 사용하는 존재가 인간이므로, 대상의 이름이나 의미까지도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결정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아를 비롯해 모든 대상을 인간 중심으로, 말하자면 주체 중심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이름 짓고 의미화 한다. 인간의 실존적 문제에 있어서 언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짝패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아와 세계, 주체와 대상(사물)을 질서화하고 의미화하며, 조직화하고 개념화하는 존재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말을 바꾸면 ‘언어는 주체의 집, 주체의 중심’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주체와 객체, 자아와 대상에 대해 사유한다. 그 사유의 결정물은 또한 주로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개념화 내지는 의미화 한다. 이러한 작업이 물론 언어만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냐면 그렇지만은 않다. 그 표현 매체, 사유의 내용을 매개할 수 있는 기호적 수단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곧잘 그 작업을 언어를 통해 수행하고 언어라는 기호적 의미로 환원한다. 이때 물론 언어가 의미를 결정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언어체계가 의미를 형성하는 측면이 강하다.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기보다는 인간이 언어를 통해 의미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특히 시인들은 은유의 언어체계나 환유의 언어체계를 지나치게, 아니 지독하게 편애하는 편이다. 유사(대치)의 끈을 따라 문맥을 형성하는 은유와 인접의 길을 따라 문맥을 형성하는 환유의 언어체계는 시적 언술에서 오랜 동안 중심축을 이루어 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의 문법에서 은유와 환유의 언어체계는 어떤 비유적 표현보다 우세종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시도 똑같이 일상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운용 체계는 일상 언어의 운용 체계와는 현격히 다른 변별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 행위는 보통 반성 없이 사용되지만, 시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일상 언어가 시적 문법에 편입되게 되면 언어는 반성 없이 사용되는 것을 거부하고 사물과 대상을 새롭게 지각하고 해석하도록 사용된다. 그 중심에 은유와 환유의 시적 언술이 기능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은유적 언어체계를 통해 자아와 대상을 끊임없이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며, 환유적 언어체계를 통해 감각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사실적 정황을 나타내려 한다.
    지난 봄, 각 계간지에 실린 신작시들을 읽었다. 그 가운데 나는 네 명의 시인에 주목한다. 이재무, 박현수, 고명자, 김완하 시인이 그들이다. 그들의 시에 나는 어떤 미학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들 시인들, 아니 여기에서 언급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수많은 시인들 모두는 공시적이며 통시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시문학의 지형도 안에서 서로 다른 높낮이와 색깔로, 서로 다른 깊이와 넓이로 서로를 비추며 존재한다. 그러면서 자기만의 미학적 영토를 꿈꾸고 그것을 구축하기 위해 부단히 자기 갱신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각기 다른 시적 특성을 지닌 이들이 보여주는 부단한 자기 갱신의 작업에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화하며, 삶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보편적인 시적 인식의 틀은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곧, 시인들은 은유적 언어체계를 통해 자아와 대상을 끊임없이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며, 환유적 언어체계를 통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사실적 정황을 표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적 작업은 곧 무한히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시적 해석과 덧붙임의 의미화에 다름 아니다.

    이런 날은 어디 먼 데서
    십수 년 소식 끊긴 인척
    기우뚱, 열려 있는 철대문 사이로
    낮달처럼 창백한 얼굴 슬그머니 들이밀 것만 같다

    쿨럭쿨럭 어제보다 더 크게

    접촉 불량의 형광등처럼 그렁그렁

    앓는 소리로 저녁이 성큼,

    내 생의 그늘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저녁」부분

    이재무 시인의 「저녁」(『시로 여는 세상』, 2007, 봄)은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저녁 시간을 시적 대상으로 생의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을 낮은 어조로 표백해 놓고 있는 작품이다. 시에서 저녁의 시간은 다양한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저녁은 하루를 마감하는 낮과 밤이 교차하는 경계의 시간대이며, 휴식이 기다리는 시간, 혹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원초적 카오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저녁은 휴식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낮과 밤, 생과 사, 생성과 소멸, 빛과 그늘 사이의 경계에서 어떤 원초적 카오스의 세계로 나가는 시간으로 기능한다. 이 작품에서와 같이 “구정물처럼 잔뜩 흐려 있”는 겨울 저녁이거나, 아니면 타는 황혼의 저녁이거나 경계에 선 시간은 시적 자아로 하여금 시적 영혼을 적극 활성화시키고 팽창시키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화자의 영혼은 낮과 밤의 경계에서 시적 감흥을 팽창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팽창은 팽팽하게 부풀어 있지만 그 드러남은 느릿하고 정관적이다.
    우리가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자아를 의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술에 취한 사람은, 그러니까 의식이 마비된 사람은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다. 시간은 술에 취하지 않은 의식, 다시 말해 자아 의식의 각성이라는 모습에서 경험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자아를 의식한다는 뜻이며, 자아의 의식은 자기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저녁」의 화자는 낮과 밤이 갈리는 경계의 시간에서 자아의 심연을 바라본다. 생의 내부, 존재의 내면, 그 깊은 심연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아주 느리게 운동한다.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심층을 파고드는 화자의 시선에는 끝내 저녁일 수밖에 없는, 쓸쓸할 수밖에 없는  “생의 그늘”을 받아들이려는 의식이 깔려 있다.  
    대상의 시간적 추이를 통해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는 화자의 느린 시선은 매우 관조적이며 사색적인 의식을 낳고 있다. 그것은 이 시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모두 1행 1연으로 처리되는 시적 의도에서 엿볼 수 있다. 이 행간의 텅 빈 여백은 너무 넓고 깊어 무한한 듯하며, 또한 적막하고 무수한 기호들이 들끓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계속해서 “쿨럭쿨럭” “절뚝거리며” “그렁그렁” 등의 의성어나 의태어를 통해 느린 시간의 추이와 함께 그것이 빛보다는 그늘을, 생성보다는 소멸의 의미화라는 것이 잘 전달되고 있다. 그래서 그 느리고 낮게 깔린 적막한 저녁은 ‘각혈’하는 저녁이며, ‘절뚝거리’는 불구의 저녁이고, “낮달처럼 창백한 얼굴”의 저녁이다. 그 적막한 공간의 느린 시간적 흐름은 그런데 어느새 ‘성큼’, 그것도 “앓는 소리로” “내 생의 그늘 속으로 들어” 선 것이다. 그러면서 화자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동시에 생의 심연이 품고 있는 비의를 드러내낸다.
    “한바탕 함박눈 쏟아놓을 듯” 흐린 겨울 저녁의 시간은 “쿨럭쿨럭 각혈하듯” 한 ‘절뚝거림’, ‘적막함’, ‘구정물’, ‘접촉불량의 형광등’으로 대치 선택되는 이미지의 흐름은 의미론적 유사성에 기초한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특히 직유적 비유의 표현법을 빌어 저녁의 시간을 다른 사물이나 관념으로 대치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정공법으로 대상을 시적으로 다시 해석하고 덧붙여 나가고 있다. 그와 같은 선택과 대치의 행위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대상을 의미화 하도록 열려 있으며, 무한한 해명이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흐린 겨울의 저녁 시간, 그 서경적 서정을 자신의 존재 내부에 투사하는 절제된 힘과 묘사력에 있다. 화자는 서정의 언어가 갖는 존재의 위력을 충분히 느끼게 하면서 삶이 지닌 소멸과 상실의 비의를 진지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가방을 열면
    소沼처럼 검푸른 심연이 출렁인다
    당신 손이
    아무리 깊이 휘저어도
    닿지 않는 어둠이 있다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끔씩 물건들이 사라지는 곳
    어느 순간 손등이
    다른 허공에 놓인 듯 서늘할 때
    블랙홀 속에
    손을 집어넣고
    우주의 자궁을 더듬고 있는 당신!
    닿지 않는 어둠 속 어딘가
    당신의 슬픔이
    희미하게 빛날 법도 하지만

    어느 가방도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담을 수는 없다
                   「가방에 손을 넣을 때」전문

    박현수 시인의 「가방에 손을 넣을 때」(『시와정신』, 2007, 봄) 또한 이재무 시인과는 또 다른 방법으로 존재의 심연에 대한 시적 해석과 덧붙임을 보여준다. 박현수 시인이 위의 작품에서 다루는 시적 대상은 가방 속의 어둠이다. 가방 속은 심연의 연못이고 블랙홀이며, 우주의 자궁이다. 그곳에는 “아무리 깊이 휘저어도/닿지 않는 어둠이 있”는 곳이다. 화자는 “가방에 손을 넣을 때” 불현듯 그 속에서 존재의 “닿지 않는 어둠”, 소용돌이 치는 “블랙홀”, “우주의 자궁”을 감각해낸다. “가방을 열면/소沼처럼 검푸른 심연이 출렁인다”는 직유적 표현으로 운을 떼면서, 화자는 그것을 “아무리 깊이 휘저어도/닿지 않는 어둠”, “블랙홀”, “우주의 자궁”으로 의미론적으로 인접한 길을 따라 시적 문맥을 형성해나간다.
    의미론적으로 등가의 관계를 형성하는 시적 이미지의 연쇄적 변화가 이르는 지점은 결국 “다 담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일생”이다. 즉 가방 속은 소, 어둠, 블랙홀, 우주의 자궁, 한 사람의 일생으로 환원되면서 실존적 심연의 바닥없는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닿지 않는 어둠 속 어딘가”에 “당신의 슬픔이/희미하게 빛날 법도 하지만” 거기에는 슬픔뿐만 아니라 인간 조건을 이루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내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은 하나의 검푸른 심연의 소(沼)이고, 블랙홀이며, 우주의 자궁과도 같이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어떻게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일생을 소, 블랙홀, 자궁으로 심상화하면서 명확할 수 없는 존재의 심연을 감각적 지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화자는 인접하는 사물의 대치를 통해서 그것을 관념화하고 의미화하고 있다. 의미론적으로 인접하는 대치관념을 통해 그가 시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것은 아마도 측량할 수도 없는 실존의 깊은 심연, “한 사람의 일생”이 간직한 삶의 실존적 깊이와 넓이를 이미지화하려 한 것이라 보인다. 하나의 시적 작업은 대상을 끊임없이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며, 명확할 수 없는 대상에 명확성을 부여하려는 덧붙임의 작업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흐드러지는 것 어디 봄날 꽃들뿐이랴
    벚꽃 무색하게 사람들도 흐드러져
    한몫 피었다 지는 한이 있대도
    저 비장한 봄을 위하여 모두들 목매단다
    걸판지게 입담이 오가는 난전
    삶의 의뭉스러움을 툭툭 분질러 놓고
    무더기로 흐드러져 난장판을 빚는다
    소주병 탁배기잔 모로 자로 나뒹구는 평상 위
    겹겹의 슬픔 토해내며
    피곤한 꽃이 되는 순간
    덧없다 소용없다 눈부신 꽃그늘
    오늘은 나도 분분하는 꽃잎이다
                      「봄 날 작천정」전문

    고명자 시인의 「봄 날 작천정」(『문예연구』, 2007, 봄)은 봄날의 서정을 노래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친절하게 작천정은 “경남 울주군 삼남면에 위치한 정자”로서 “수려한 주변 경관과 벚꽃 터널이 유명”한 곳이라고 주를 달아 밝히고 있다. 꽃의 서정, 꽃은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불이며, 대지의 별들이라는 것을, 빛이 되기를 바라는 불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꽃의 개화는 열림으로의 지향을 뜻한다. 꽃은 하늘의 푸르름을 향해 스스로를 연다. 그리고 또 식물의 생식기에 불과한 꽃은 그러나 피고 지는 양상에 따라 서로 다른 다양한 감정을 유발한다. 우리는 피는 꽃에서 가능성, 희망 등속의 생명의 이미지와 상승하는 이미지를 느끼게 된다면, 지는 꽃에서는 노쇠, 생명의 유한성, 소멸 등속의 무상함과 덧없음의 죽음의 이미지를 느낀다. 꽃이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빛이며, 대지의 별이라는 시적 인식과 그것이 유발하는 정서는 그동안 대부분의 시인들이 해온 꽃에 대한 시적 의미화의 작업인데, 고명자 시인도 이러한 꽃에 대한 시적 인식과 의미화 작업에 연루되어 있다.  
    위와 같은 점에서 고명자 시인의 시는 꽃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을 그대로 밟고 있다. 서경의 서정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첫 행부터 그러하다. “흐드러지는 것 어디 봄날 꽃들뿐이랴”고 영탄조로 끝맺는 첫 행에서부터 화자는 시적 대상에 대한 강한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마치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를 연상할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상의 전개는 간결하다. 정리하자면 ‘봄날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벚꽃이 무색하게 사람들도 그 밑에 한 무더기로 흐드러져 난장판을 빚는다.’ ‘오늘은 나도 분분한 꽃잎이다’는 것이다. 이 행간에는 봄날의 서정이라는 강한 전류가 흐른다. 화려한 꽃은 지면 그뿐 덧없고 허망하다는, 우리네 의뭉스러운 삶도 그러하다는, “덧없다 소용없다 눈부신 꽃그늘”이라서 “오늘은 나도 분분한 꽃잎”이라는 인식이다.
    화자는 상춘객이었을 것이고, 꽃그늘 밑에서 “삶의 의뭉스러움을 툭툭 분질러 놓고” 난장판을 벌인 한 무더기의 취한 상춘객들을 만난다. 화자에게 그것은 즐거움보다는 “겹겹의 슬픔을 토해내”는 장면으로 보인다. “눈부신 꽃그늘”은 “덧없고 소용없”는 것이기 때문에, 화자 자신도 상춘객들과 마찬가지로 “분분한 꽃잎”이다. 여기에 짙게 깔린 꽃에 대한 보편적 정서는 꽃에 대한 시적 해석의 또 다른 덧붙임이다.    

    흐르는 물살 거슬러 재빨리 다리를 놓아도
    별이 내릴 즈음 그의 하루
    물길 가르다 호롱불처럼 잦아들었다
    그의 길 강을 거슬러 오르는
    가파른 외길이었으나
    끝내 어디에도 가 닿지 못하였다
    젖은 허공을 딛고 그의 꿈은
    물속 어둠 쓸기만 하였다
    물 위에 지어진 빈 집 한 채
    강이 그를 놓아주자
    그는 허공을 안고
    강을 떠나갔다
                           「수상가옥」부분

    시는 서정의 언어이다. 시를 시답게 하는 원초적인 근원은 서정에 있다. 시의 언어는 서정의 언어이고, 이 지점에서 서정성은 시성(詩性)을, 예술로서의 시의 원형적 자질을 획득하게 한다. 서정이 본래 노래하는 정신에서 비롯하였다는 사실은 시가 음악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한다는 말이다. 서정은 이러한 음악적인 요소들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 연민이나 슬픔, 분노 등의 인간이 느끼는 여러 정서적 감흥과 자질들이 서로 어울려 시로서의 고유한 서정성을 환기한다. 여기에 서정시의 매력이 있고 가치가 있다. 김완하 시인의 「수상가옥」(『문학들』, 2007, 봄)은 이러한 서정성에 대한 새로운 시적 인식의 덧붙임이며, 서정적 풍경의 제시이다. 이 시는 문명의 대척점, 그 원시의 공간에 건축되었다.
    김완하 시인의 「수상가옥」은 강의 흐름과 집의 고정성, 떠남과 머물음이라는 상반된 상상력에 의해 건축되었다. 집은 보통 지상에 지어진다. 집은 유동의 삶으로부터 정주(定住)시키는 공간이다. 그러나 수箚×年서 창조적 구성 원리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패러디 시학이 지닌 원전의 방법과 내용, 제재와 주제, 문체와 사상, 형식과 의미 등을 조롱하면서 이를 비판하거나 전복하거나, 창조적인 계승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해준다. 따라서 그의 노력은 패러디 시학이 우리 문학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게 해준다는 차원에 의미롭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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